가을의 향이 하얀 구름을 타고,까아만 하늘을 흘러짙어져가는10월의 밤이었다.늙은 감나무 가지에는홍시와자리를 바꿔앉은 노오란달빛이소담하게쉬고있었고, 부서지는 호수의 윤슬들은 낚시꾼들의 장화에가닿아살포시 손을 얹고는 그들의 세월을 매만져주고있었다. 사람이 만든 빛이 없는 시골의 밤하늘은완벽한 밤이 되어 가없이펼쳐져 있었지만, 누군가가수놓은 별빛들은 가을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어지금보다도반짝거릴 수는 없었다. 제비들은 떠날채비를 하였고,기러기들은 하나, 둘. 돌아와 인연의시작과 맺음의 조화를 그리며, 우주의 순환을알려주고있었다.다시 만난 가을의 품에서 물결 속에일렁이는나를 돌아보았다. 지난하게도말이없던슬픔들 속에서,모질스럽게도 잘 버텨낸 한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방구석에 쳐박혀 꿈틀거리는 등뼈를 적시던 짠내나는눈물들도, 나의 얼굴을 향해직선으로 떨어져 내리던천장도, 밤새워요란스럽게흔들어대던 나의 창들도,이젠 모두 아련하게사라지고, 이곳에는 고요함만이남아 꽤나 괜찮은 가을을 그려내고 있었다.
5월에 심었던 고구마들은제법 그럴싸하게 자라서찾아든 손들에게 한조각의 부드러운 마들렌이 되어자신의소명을 여전히 다해주고 있었다. 고구마를 캐며,재잘거리고, 새끼 손가락만한 고구마를 집어들고는이세상에 혼자밖에 없다는 듯, 떠들썩하게 함박 웃음을짓던 아이같은 그들의 표정들을 볼 수 있었으니,고구마들에게 그저 고마운 마음이었다.하지만,'그동안고생많았어.'하고인사를 전하면서도, 조금씩비어가는 고구마의 흔적들이아쉬워서괜스레텅빈흙을 삽으로 뒤적거려보곤 하였다. 감정의 선명함은떠나가고 남아버린 자리에서 흐르는 여운들로 인해더욱 농도가 강렬해지는 듯하였다. 여운에 취해,여운을이어가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민하다가, 나는문득마늘을떠올렸다.
아마도 마늘이 나를 닮은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것이다.
그많은 작물들중에 왜 하필 매운마늘이었을까?
마늘이 자양강장제라서? 아니면타임지에서 선정한세계 10대 건강식품이라서? 물론, 그런 이유들이 없을수는 없겠지만, 나에겐 그저 쵸코케익에 쵸코로 그려진 하트 문양 정도의 의미에 불과하였다. 아마도마늘을 가꾸는 일이, 어두웠던 터널을 지나오던나를돌아보는 듯, 생각되었는지도 모르겠다.연노랑빛마늘을심으려면,푸석한 통마늘을 집어들고는껍질을 한겹한겹벗겨내고, 낱알로하나하나떼어내야 하였다. 어릴때 엄마가 마늘을 까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지만,깐마늘과 다져진 마늘이 등장한 이후로는 그 안온한풍경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솜이불 속에 들어가머리만 쏙 빼내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듯한 엄마의마늘 까는 모습.그건 사랑과 정성이 만들어 낸한폭의그림이었다는 걸,새삼 요즘에서야 깨닫고 있는 나였다.별것 아닌 듯, 지나가버린 따듯한 찰나들이 그리운 세월속에 지금 나는 서있었다.별것 아닌 마늘이었지만,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분명애틋하게도 그리워할순간이기에 다정하게 마늘을 매만졌다.씨앗이라하기에는너무나 크지만, 낱알들하나 하나에는 모진겨울을 견뎌내어줄 희망들로가득차 있었다. 마늘을벗길때 쏟아지는 눈물과반복되는 재채기로몸은들썩거렸지만, 가득한희열들이쏘아주는 축포라여겨졌다. 잡념이 사라지는 마늘멍을 지나 마늘줄기가꼿꼿이 하늘을 향해 두팔 벌리고 있을 눈부신 봄날의5월을 상상해 보았다.그걸환희라고 노트에 적어두고는, 마늘을 까며 들여다보던 나는 희망이라나지막히읊조렸다.
바랄 '희'와 바랄 '망'. 바라고,바래야만 하는 간절한일을 희망이라고 한다면, 소박한 희망을 다듬는 일은,아마도 행복이라 불러야할것이다. 치유와 재생은 마늘 껍질을 벗겨내고,쪽을 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자신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고통과 슬픔의 근원을마주하면서, 감추지 않은있는그대로의 자신을받아들이며, 존중해 주는 일이치유의시작이자, 완성인듯 하였다. 물끄러미 낱알의 마늘들을 바라보았다. 굵고건강해 보이는녀석들부터, 잘고 색이 바래버린녀석들까지,하지만그들 모두 마늘이었다. 내가 가진좋은부분들은 굵고, 건강한 마늘처럼,땅 속에서 싹을 틔우고, 언젠가는 하늘로 솟아오를 수 있도록잘 심어서가꾸어 나가야할것이었고, 부끄럽거나,상처받은 나의영혼들,또한 나의 소중한 일부이니햇살 속에서 잘골라내서씻겨내어, 냉장고에 곱게 넣어두었다가, 내 몸안에잘 스며들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하였다.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그게 소중한 나였고, 사랑해야만하는 나였다.
'사람들이 찬양하고 성공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삶은단지 한 종류의 삶에 지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다른여러 종류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한가지 삶을과대평가하는 것일까?'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 -
검은빛 땅 속에는 빛 한줌스며들지 못하기에 낱알의마늘들에 붙어 있을세균들이 땅 속에서는 쉽게 번식할수 있었다.그래서 마늘을 파종하기 전에, 마늘 전용소독약에 낱알의 마늘들을 넣고,모시빛의햇살아래에서 하루 정도 기다려야하였다.
소독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를아껴주는 이들의 마음을 받으며, 그들에게 기대어보기도 하면서,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불순물을떼어내는 일이었다. 나 또한 내 삶에 깊숙히파고들어,낙인처럼 살아가고 있는불순물들로 인해나 스스로를 폄하하며, 자책하고,자발적 고립을 택하였던,그런시간들이 있었다.물론, 앞으로도 빛과 어둠의 반복만큼이나 무수히 만나게 될,작은 기척도 없이 살금살금 찾아오는 그런 두려운 순간들,그리고그로인해 조각 나버린 마음들은언제든 다시마주하게 될 것이고, 언제나 그러하듯생의덧없음과무의미함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아마도 생이 점멸하는 그날까지도이런 부침은 지루하리만큼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삶의 불순물들을 밝은 곳에 놓아두고 펼쳐보며, 이젠 소독을 할 줄 알게 된 듯 하였다. 아름다운 것들과 사랑스러운 것들 속에 좌절과 자기폄하, 슬픔과 고통...이런 말들을접어서 넣었다. 살아 숨쉬며, 그 자리에서 항상 묵묵히 기다려주는 나무들과 꽃들은 나의 존재에 가지와 잎사귀를 드리워불가해한 기쁨과 살아있음을 느끼게해주었다.고요해 보이지만, 역동적인 그들의 어깨에손을 올려두고, 사색하는 일은 나를안아주는 것이었고,그러한 시간들은 나를깊어지고,단단해지게 하였다.
소독의 과정을 거친 마늘들은 세균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고, 그들은 승리하며, 끝내 햇살에 닿을 것이다.
'사색을 함으로서, 우리는 건전한 의미의 열광 속에빠질 수 있다.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우리는행위들과 그 결과들로부터 초연하게 서있을 수 있다.그렇게되면, 만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격류처럼 우리의 옆을 지나치게 된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 -
마늘이 소독 중인 동안, 고구마가 자랐던 흔적들에거름과 비료를 흩뿌리고는 흙과 잘 섞어서 마늘이잘 자랄 수 있도록 땅을 갈아주었다.마늘용 뿌리강화제를 넣어주고, 온도와 습도를유지해 줄 비닐로 땅을 덮어주었다.비닐 위에 10센티미터 간격으로 규칙적인구멍들을 뚫어 그곳에 소독된 마늘들을 파종하였고,흙으로 덮어주었다. 되었다.이제 마늘만이 스스로의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곳에서 벚꽃 흩날리는봄을 그들이 맞이하길 바래보았다.틈틈히 물을 주고,웃거름을 덮으며,나 또한 마늘 옆에 쪼그리고 앉아,하이얀 목련과 분홍빛복숭아 꽃을 보고 있기를소망하였다.돌이켜보면, 나의 고단했던 치유의시간들이엉거주춤 하게나마 앞을 향해 흘러갈수있었던 건, 나를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는 이들이 그 길에서 박수를 보내며, 인도해 주었기 때문이었다.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일터에서의 친애하는 팀원들, 글과 마음을 나누는 이곳 브런치에서의 글벗들, 그리고 너그러운 자연. 어쩌면 좋은환경들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좋은 환경을 만들기위해, 나 또한 부단히도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이젠잘 알고 있다. 가능성에 미리 벽을세우지 않고, 사소한 희망이라도 쥐어보려 애쓸 때,나의 환경은 조금씩넓어지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도 자주 알아볼 수 있게 되는듯 하였다.
'미래를 생각할 때, 또 앞으로 가능한 일들을 생각할 때우리는 앞쪽 방면으로는 어느정도 느슨하게 선을그어놓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윤곽을희미하고 막연한 것으로 남겨두어야 할것이다.마치 우리의 그림자가 태양을 향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땀을 흘리듯말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 -
시골서재에서 식물들을 가꾸며, 치유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지 반년 정도가흘렀다.
사실 아직 치유에 대해 나는 눈꼽만큼도알지 못한다.단지, 부단히도 상처받고, 그만큼 치유해 나가야하는내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과 결국 치유의 길 끝에는사랑하고,사랑받아야 한다는 처방전이 놓여있다는것을 어슴프레하게나마 잡아 볼수 있을 뿐이었다.
사랑받을 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가 귀하게 여기게되고, 사랑할 때,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만들어졌다.삶, 사람, 사랑, 살림. 나는 어문학자가 아니라 잘은모르겠지만, 이들이 비슷하게 생긴 이유가 있을 듯하다.'자기 앞의 생'에서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는하밀 할아버지의 말을오늘도 음미하며, 씹고, 삼킨다.철학과 심리학 공부를 하고 싶어 야간 대학원을 살펴보고 있다. 마음에 대해 배우고, 타인과 나의 마음을 좀 더 섬세하게 바라보며, 그렇게 다정히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다. 지금까지의 기록들이 훗날 좀 더 전문적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글로 다시 태어나길 바래본다.기타 좀 쳐보라는 친구의 말에 순간의 정적과 함께생각하였다. 기타...가 있었구나.한때는 사랑하는 이가 좋아하는 것이라 배웠었지만,그가 연무처럼 사라져 버리고, 남아버린 흔적이었던 기타였다. 상흔이 되어 내 몸과 마음에 깊이 패인 기타였기에 이후로 시선을 둘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타를 다시 배울 수 있을 듯하였다.기타는 그저기타일 뿐이었고, 상처는나 스스로가 내 몸과 마음에 난도질한 생채기였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타를 다시 배우고, 연습해 보려 한다.
'잘 못해. 그런데 이제는 연습해서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나중에꼭 들려줄게.'
잠들어 있던 갈색빛 기타를 꺼내어다시 만져보았다. 매끈한 감촉에 나도매끈해지는듯 하였다. 밤이 내려앉은 가을의중심에서달빛이 여태 황홀하니이젠 길을 잃지는 않을듯 하였다.아니, 길을 잃더라도 괜찮았다. 나에겐 마늘이 있으니 말이다.
길을 잃은 당신이지만, 사랑받아 마땅하다.
'길을 잃고 나서야, 다시 말하면, 세상을 잃어버리고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관계의 무한한 범위를 깨닫기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