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들이 됐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이왕에'다. 이 단어는 마치 좁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의 자유와 같다. 이것만 있다면 무엇이든 구질구질한 연결고리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이것은 절대 나의 경우가 아니라 예시에 불과함을 명백하게 이야기해둡니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애인 같은 걸 만들지 못했다면 '이왕에' 애인 같은 것은 집어치우고 신나게 많은 남자들과 놀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또 이제 곧 죽어도 술집에서 민증 같은 건 보여달라고 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면 '이왕에' 아주 섹시하게 변신해보겠다는 기똥찬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주머니에 돈이 없다면 '이왕에' 독수공방 하며 홈 트레이닝으로 몸을 죽이게 만들어보겠다는 일념을 가진다.
'이왕에'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가장 밝은 면을 찾아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이왕에' 사용 시 유의할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격하게 실행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 '이왕에' 실행하는 일이 '이왕에 전에' 실행하려던 일보다 매력적이진 않아도 꽤 괜찮을 정도여야 한다. 만약 야수 같은 남자와 한동안 달콤한 밤을 보내지 못했다고 해서 '이왕에' 수녀원에 들어가자라고 결심해 버리는 경우가 최악의 부작용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 '이왕에'의 한 수단으로 파마를 했는데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분명 어제 선생님께선 엘레강스한 스타일을 완성해주셨는데 오늘 머리를 감고 나니.. 푸들이 됐으니.. 이건 신나게 많은 남자와 놀아보겠다는 계획과 아주 섹시하게 변신해보겠다는 기똥찬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계획의 실패. 그래도 언제나 '이왕에'에겐 보너스 카드가 존재하는 법!
'이왕에'의 결과를 바꿔, "이왕 이렇게 된 거, 내 개성대로 재밌게 살아보자!" 하면 그뿐이니 말이다. :)
2018. 반가운 봄비
강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