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작 May 20. 2021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불행의 연속을 멈추게 하는 방패는 뭘까. 


엄마가 입원한 병원 앞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면서 생각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하고, 연이어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 속에서 우리 가족은 자연스레 '이사를 잘 못한 거 아니야?'라는 의심을 품게 됐다. 어두운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각종 의심과 불안의 터널 속에 갇히게 된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 순간들을 신기한 운명으로 포장하듯- 그 반대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터널 속을 헤매다 두려움이 증폭되면 무릎을 꿇고 신적인 요소에 매달리며 하나님부터 시작해서 부처님, 성모마리아님, 우주신님 등 세상의 모든 신들을 쉬지 못하게 귀찮게 하는 것이다.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하지만 이 모든 의심과 불안의 연속은 두 글자의 단어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바로, '직면' 


직면하는 것이다. 연애에서 있어서라면 좋은 이별이라는 것도 결국 직면하여 인정하는 것이다. 헤어진 연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거나, '아닐 거야' 부인하며 밤낮으로 술을 퍼마시는 것, 몇 달이 지났는데도 12시만 되면 '자니'문자를 보낼까 고민하는 것, 심지어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 또는 그녀 집 앞을 서성이며 추억을 곱씹는 일은 바람직한 이별이 아니다. 심장 어택으로 술이라는 수혈이 필요하다면 마셔도 좋지만 '이건 마지막 술잔이다'하면서 꼴깍 넘기고는 잔을 머리 위로 털고 일어날 줄 알아야 한다. 대게 이렇게 한 번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처방전은 시간이다. 시간이란 묘약이 점점 아픔을 무디게 만들어 직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케이. 그리 됐다 이거지? 그럼 해결 방법이 뭔데?'라는 사고. 그런 것이 살면서 절실하게 필요하다. 왜냐면 인정하기 힘들지만- 우리의 가족과 자신을 포함해 모든 인간들은 언젠가 죽기 때문이고 그 길은 밝지 않기 때문이다. 10대나 20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축의금보다 부조금을 더 내야 하는 30대 이상이라면 내 말이 어쩐지 이해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성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도 불안이 걷히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찾은 해결법이 최선인가라는 데에 있다. 당신이 선택한 일이 당신의 최선인가. 내가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그런 의심들은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에 잘못된 공식을 적용해서 생길 수도 있고, 자신에게 풀만한 여유 시간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다. 이럴 땐 바로 해설집을 열어서 보면 편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실력에 나아짐은 없는 것이다. 그럼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배웠을까. 떨지 말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보자. 아니라고 생각하면 바로 다른 공식을 대입한다.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해보고, 아니면 다른 것. 시험이나 건강이나 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을 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를 접어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는 있다. 



글. 강작(@fromkangjak)


추신.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어느 시집 제목이 이토록 아프고 강한 말이었는지 아마도 잘 몰랐었던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 후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