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정신상담 같은 건 받을 일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다 큰 서른넷, 나는 다섯 평의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상담사는 내게 검사결과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세요. 우울증과 예기불안을 앓고 계시고 분노조절장애의 초기 증상들도 나타나고 있어요.
검사지에는 내가 체크한 모양인 '갑자기 무언가를 부수고 싶다'라는 항목에 빨간 별이 세 개나 그려져 있었다. 분노 수치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검사지를 뚫을 듯 높게 치솟아 있었다. 나는 원래 이러지 않았다. 화가 나는 상황이 발생해도 앞에선 말 못 하고 나중에 이불 킥이나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근 나는 달라져있었다. 조금이라도 불쾌한 상황이 발생하면 작은 팬티를 찢어버릴 정도로 분노 수치가 올라와서 생판 모르던 사람에게도 버럭 화를 냈다. 갑자기 잘 있다가 포효하는 늑대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속이 잠잠해졌는데 실제론 그저 힘이 빠져 씩씩-되는 것뿐이었다.
- 억울하신 게 많으세요?
억울한 게 많냐고? 나는 억울하지 않다. 아니다 억울하다. 아니다 억울하지 않다. 아니다 억울하다! 억울하지만 억울한 척하고 싶지 않다. 나는 괜찮다. 아니다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고 싶었다. 항상 정상 범주에 속하고 싶었다.
- 보통 이런 증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발생해서 점점 커지기 마련이죠. 어렸을 때부터 어려움이 있었을 거예요. 과거로 돌아가 봐야겠는데요?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의자를 꽉 잡았다. 여기서 도망가면 인생에 질 것만 같았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어느새 엄지손가락 끝을 검지로 뜯고 있었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었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내게 그만큼 힘든 일인 것 같았다. 다 지났으니까- 다 견뎌냈으니까- 꺼내지 않고 깊게 파묻어둔 것에 다가가는 것이.
집 인근의 텃밭을 신청하고 마주한 10평의 밭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내 마음의 크기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보다 훨씬 큰 것인지도. 황량한 흙더미. 정말 이런 곳에 생명이 트고 자라기나 할까? 의문이었다.
- 여기! 비료 포대 2개, 알 비료 2 봉지! 흙 우선 다 뒤집고 비료 잘 섞으면 돼요! 좀 힘들 거야!
땅주(땅주인)가 멍- 하니 서있는 내 옆에 비료들과 삽을 툭 던져두고 말했다. 꽤 비싼 경작료를 지불하고 땅을 고르는 일도 내가 해야 한다니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텃밭의 규칙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0평밖에 안 되는데 뭐가 힘들겠어.' 나는 삽을 불끈 들어 올렸다. '헉' 삽의 무게가 상당했다.
기죽지 않고 흙에 삽을 내리꽂았다. 그리곤 TV에서 본 것처럼 한 발을 사용해 삽을 흙에 꽂고 몸의 무게로 흙을 들어 올렸다. 성공! 단 한 번의 성공.. 두 차례 세 차례 늘어날수록 나는 10평이 대단히 큰 크기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젠장. 너무 힘들잖아?!
곡소리가 바람을 따라 흘렀다. 바람이 찬 3월인데도 옷 안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등과 어깨는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억울한 게 많으세요..?'
상담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단전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몸은 헐크로 변하고 있었다. 놀란 흙덩이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더 이상 나를 말릴 자는 없었다! 땅 속 깊게 뿌리 내려고 있었던 왕따, 직장 내 괴롭힘, 성추행, 가정의 어려움들이 뜨거운 땀방울에 섞여 세상 밖으로 튀어 올랐다. 울퉁불퉁한 흙을 보니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온몸이 터질 듯 뜨거웠다.
인생에 한 번쯤은 반드시
깊숙이 묻어둔 아픔들을
뒤집어 꺼내야 한다.
괜찮은 척하며 살지만
결코 괜찮은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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