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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Aug 07. 2022

인생 뒤집기

평생 정신상담 같은 건 받을 일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다 큰 서른넷, 나는 다섯 평의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상담사는 내게 검사결과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세요. 우울증과 예기불안을 앓고 계시고 분노조절장애의 초기 증상들도 나타나고 있어요.


검사지에는 내가 체크한 모양인 '갑자기 무언가를 부수고 싶다'라는 항목에 빨간 별이 세 개나 그려져 있었다. 분노 수치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검사지를 뚫을 듯 높게 치솟아 있었다. 나는 원래 이러지 않았다. 화가 나는 상황이 발생해도 앞에선 말 못 하고 나중에 이불 킥이나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근 나는 달라져있었다. 조금이라도 불쾌한 상황이 발생하면 작은 팬티를 찢어버릴 정도로 분노 수치가 올라와서 생판 모르던 사람에게도 버럭 화를 냈다. 갑자기 잘 있다가 포효하는 늑대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속이 잠잠해졌는데 실제론 그저 힘이 빠져 씩씩-되는 것뿐이었다.


- 억울하신 게 많으세요?


억울한 게 많냐고? 나는 억울하지 않다. 아니다 억울하다. 아니다 억울하지 않다. 아니다 억울하다! 억울하지만 억울한 척하고 싶지 않다. 나는 괜찮다. 아니다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고 싶었다. 항상 정상 범주에 속하고 싶었다.


- 보통 이런 증상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발생해서 점점 커지기 마련이죠. 어렸을 때부터 어려움이 있었을 거예요. 과거로 돌아가 봐야겠는데요?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의자를 꽉 잡았다. 여기서 도망가면 인생에 질 것만 같았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어느새 엄지손가락 끝을 검지로 뜯고 있었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었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내게 그만큼 힘든 일인 것 같았다. 다 지났으니까- 다 견뎌냈으니까- 꺼내지 않고 깊게 파묻어둔 것에 다가가는 것이.



집 인근의 텃밭을 신청하고 마주한 10평의 밭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내 마음의 크기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 마음보다 훨씬 큰 것인지도. 황량한 흙더미. 정말 이런 곳에 생명이 트고 자라기나 할까? 의문이었다.


- 여기! 비료 포대 2개, 알 비료 2 봉지! 흙 우선 다 뒤집고 비료 잘 섞으면 돼요! 좀 힘들 거야!


땅주(땅주인)가 멍- 하니 서있는 내 옆에 비료들과 삽을 툭 던져두고 말했다. 꽤 비싼 경작료를 지불하고 땅을 고르는 일도 내가 해야 한다니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텃밭의 규칙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0평밖에 안 되는데 뭐가 힘들겠어.' 나는 삽을 불끈 들어 올렸다. '헉' 삽의 무게가 상당했다.


기죽지 않고 흙에 삽을 내리꽂았다. 그리곤 TV에서 본 것처럼 한 발을 사용해 삽을 흙에 꽂고 몸의 무게로 흙을 들어 올렸다. 성공! 단 한 번의 성공.. 두 차례 세 차례 늘어날수록 나는 10평이 대단히 큰 크기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젠장. 너무 힘들잖아?!



곡소리가 바람을 따라 흘렀다. 바람이 찬 3월인데도 옷 안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등과 어깨는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억울한 게 많으세요..?'



상담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단전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몸은 헐크로 변하고 있었다. 놀란 흙덩이들이 여기저기 튀었다.  이상 나를 말릴 자는 없었다!   깊게 뿌리 내려고 있었던 왕따, 직장  괴롭힘, 성추행, 가정의 어려움들이 뜨거운 땀방울에 섞여 세상 밖으로 튀어 올랐다. 울퉁불퉁한 흙을 보니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눈물쏟아질 것처럼 온몸이 터질  뜨거웠다.



인생에 한 번쯤은 반드시

깊숙이 묻어둔 아픔들을

뒤집어 꺼내야 한다.

괜찮은 척하며 살지만

결코 괜찮은 게 아니니까.




글. 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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