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땅주에게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아스파라거스 모종을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사라는 내용이었다. 초봄에 땅주에게 산 씨감자가 좋은 수확을 내었기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며칠 뒤 땅주를 따라 간 뒤뜰에는 기린같이 목이 길고 야들야들한 아스파라거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화초같이 예쁜 모양에 반하여 계획과는 달리 그만 다섯 개나 차에 싣고 말았다.
일주일 뒤 모종을 가지고 신나게 텃밭으로 향했다. 이웃들이 모두 땅주에게 같은 문자를 받았을 테니 저번 씨감자 때처럼 많이들 사서 이미 심어놨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아스파라거스를 심어놓은 텃밭이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이웃 아저씨의 말씀으로 금방 풀리게 되었다.
-아스파라거스 샀어요? 몇 년은~ 키우는 건데..(이 부분을 노래처럼 하였다) 아이고야! 한해 여기서 하다가 또 옮겨 심어야 되는데 우짜노!
황당했지만 아저씨의 표정이 살짝 놀리는 것 같아서 나는 '저희도 알고 있었거든요?!'라는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적절한 설명을 해주지 않은 땅주에 대한 분노와 잘 알아보지 않고 산 스스로에 대한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화를 남편에게 풀기 위해 우리가 초보 농사꾼이라고 얕본 것이 아니냐며 씩씩거렸더니 남편은 그저 가자미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누가 뭐라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우리 텃밭에서는 우리 마음대로 해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이 텃밭은 나의 텃밭이고, 죽든 살든 내가 책임지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났다. 비료를 주고 정성껏 키워도 줄기가 보이지 않아 '역시 사람들 말을 신경 썼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슬슬 올라올 쯤이었다.
레스토랑 흰 접시 위에 적당히 구워져 씹으면 달큼한 맛을 냈던 그 아스파라거스가! 땅 속에서 쏟아 올라와 있는 것이다! 나는 동네 이웃을 모두 불러놓고 우리 아스파라거스를 자랑하고 싶을 정도였다. 잘라먹으면 또 자라고, 또 자란다니! 기특하기도 하여라. 그날 저녁 남편과 나는 스테이크를 먹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서 모종을 산 값보다 고기 지출로 더 큰돈을 썼지만, 싱싱하고 도톰한 아스파라거스를 보고 있자니 뿌듯하고 행복해서 이미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아스파라거스가 값졌던 것은 타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나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진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타인들의 말이나 시선에 쉽게 흔들렸다. 마치 아스파라거스의 얇고 긴 잔 가지들처럼 이곳저곳에서 바람이 불면 마음이 밤새 요동을 쳤다. 신경을 끄고 살기에는 그들의 엄포가 무섭고 두려웠다.
이를테면 결혼에 관한 것도 그랬다. 서른 중반에 다다르니 가족과 친구들, 직장동료들도 내 결혼의 시기를 염려했다. '더 늦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려고 하면 너도 아이도 힘들단다.' 그런 말을 들으면 당장 거리에서 헌팅이라도 해서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아이를 원하는 건지, 아닌 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이 아니면'이라는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내 생각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통념은 가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직접 살아오면서 깨달은 삶의 통념이기 때문이다. 아스파라거스처럼 오래 사는 작물들은 한 해용 텃밭에 심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통념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나는 우선 내가 아스파라거스를 심고 싶으냐, 그것을 심으면 책임을 질 수 있느냐-를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이것은 나의 텃밭이고, 나의 삶이니까. 누가 뭐래도 스스로의 삶을 일구고 그것에 만족하며 행복할 용기가 있다면- 나는 사회적인 통념보다 자신의 통념을 우선에 두고 살고 싶다.
때론 흔들릴 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
굵은 아스파라거스 줄기를 가진 사람,
언제나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글. 강작(@anyway.kkjj)
다, 잘 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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