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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Sep 04. 2022

가엽고 고마운 나의 현재에게

상담사가 물었다.


- 제가 이렇게 상담을 해보니까 지혜 씨는 지금 대부분의 시간을 슬픔과 불안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생각했을 때 지혜 씨의 현재는 어떤 가요? 현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 현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요? 나의 현재에게...?


한참 망설이는 내게 상담사는 일주일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보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은 비가 많이 내렸다. 쉽게 집으로 뛰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지하철 출구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상담사의 질문이 떠올랐다.


한 번도 현재를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슬프면 슬픈 대로 울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웃으며 살아왔을 뿐.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져서 현재를 잠식시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미래를 위해 사는 삶이 곧 현재를 위한 거라고 무의식으로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현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냐는 물음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슬픔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현재를 그림으로 그리면 아무것도 없는 큰 집의 모서리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아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미래가 보여주는 불안의 덫에 걸릴 것 같아 떨고 있는 아이. 그 아이에게 매일 일어나라고 앞으로 가야한다고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지붕이 없는 그 흰 종이집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아이를 불렀다.


- 얘야.


그리곤 거세지는 빗줄기를 우산으로 가리며 흐느껴 울었던 것 같다. 지난 과거와 일어나지 않은 미래는 차가운 바람으로 현재를 휘감고 있었고 슬픔과 불안, 우울과 분노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아이의 볼을 붉게 만들었다.


- 미안해.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토록 아프게 했는데도 쓰러지지 않고 살아있어 줘서 고마웠다. 폭우 속에 우산을 폈다. 그리곤 마음으로 다짐했다. 앞으로 슬프고 불안해도 현재를 잊지 않겠다고, 아끼며 살아가겠노라고.  


쓰러진 고추나무들


장마가 지난 텃밭은 엉망이다. 위풍당당하던 잡초들도 모두 쓰러지고 기울어진 철대 옆에 덜 익은 방울토마토도 우수수 떨어져 있다. 나는 장화를 신고 장갑을 단단히 꼈다. 철대를 다시 세우고 쓰러진 나무들을 제자리로 고정시킨다. 이름 모를 곤충들과 모기들이 날뛰지만 힘을 내어 무너진 두둑을 올려주면 마무리.

 


터프한 나의 움직임을 보고 남편이 놀라서 멍하니 쳐다봤다. 나는 용기 내 조금씩 나의 현재를 일으키고 있다. 어떤 태풍이 와도 어떤 슬픔이 와도 내 텃밭을, 나의 현재를 꼭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고추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돌아오는 길, 장마가 지난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그 하늘을 마음속 현재와 함께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느낌- 얼마만인지. 따뜻한 행복이 분홍 노을처럼 가득 차 올랐다.



글. 강작(@anyway.kkjj)



모두들 태풍조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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