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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Sep 13. 2022

한없이 아이여도 괜찮아요

제 기억 속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에는 항상 자연이 있었습니다. 깊은 시골의 밤, 아버지가 손짓으로 하늘을 가리키자 눈동자 안으로 쏟아졌던 별들. 한 겨울 올라간 백담사에서 다음날 눈을 떠 보니 마주친 겨울의 왕국. 등산객 아저씨들의 응원을 받으며 기어코 올랐던 한라산 정상의 풍경. 자연을 빼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자연에 푹 빠져 사는 것이 아닐까요?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듯이 자연을 즐기기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법. 저는 그것이 '아이 같은 순수한 태도'와 '자연을 존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만 있다면 자연은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같아요.  


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사랑하는 친구와 흰 우비를 입고 걸었던 보성녹차밭에서의 기억이 납니다. 친구와 저의 여행 모토는 요즘 말로 '오히려 좋아'였죠. 경보가 뜨지 않은 상태라면 젊은 긍정을 막아낼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날은 펜션에 저희 말고는 손님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전날 저녁 신난 펜션 사장님으로부터 오리구이와 즉석 수확한 자스민차를 얻어먹은 뒤 보성에 흠뻑 취해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다음 날 새벽같이 눈이 떠졌죠.


비가 더 많이 올까 봐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창밖의 비는 여전히 많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얼굴에 파우더를 두들기고 있는 친구를 보니 웃음이 나더군요. '역시..!' 씩씩하게 녹차밭으로 향했습니다. 우산은 필요 없었어요. 흰 우비와 아이 같은 순진무구함만 갖추면 준비 끝.



살다 보면 '왜 그래야 해요?'라고 묻고 싶은 날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너무 많은 규칙들이 있죠. 음식을 먹을 땐 젓가락과 숟가락을 써야 하고, 어린아이는 혼자 화가 나도 욕을 해선 안되고, 학생 땐 사랑보단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꿈이 있어야 하고, 대학을 나오면 마땅히 회사에 들어가야 하고, 결혼을 하지 않으면 외로울 거라는 시선을 참아야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야 행복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휴대폰 없이 길을 잃어선 안되고, 비가 오면 편의점에서 삼천 원짜리 비닐우산이라도 사야만 하죠. 사람 사는 세상의 보이지 않은 규칙들.


하지만 텃밭 생활을 하며 자연 가까이에서 뒤늦게 깨달은 것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 자연 속에서 느끼는 행복이 참된 행복에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에 다가가려면 많은 규칙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저 아이같이 첨벙첨벙 웃고, 길모퉁이에 핀 작은 민들레도 아껴주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30년을 넘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살아온 지라, 아직 저도 '나는 자연인이다' 아저씨들처럼 자연인이 될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제 어떤 것이 참된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인지 알았으니, 사람 사는 곳의 규칙이 버겁다 느껴질 때마다 자연에 다가가 한없이 아이가 되어도 괜찮다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태어났을 때처럼 맑게 웃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 강작(anyway.kk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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