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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Aug 23. 2022

평범하고 위대한 행복

어릴 때 우리 집 책장엔 얇은 갱지로 된 두꺼운 책이 마흔 권쯤 꽂혀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꺼내 더듬더듬 작은 글씨를 읽다 코를 박고 잠들곤 했다. 그 안에선 시큼하고 구수한 세월의 냄새가 났다. 나폴레옹과 에디슨, 이순신과 유관순 같은 위인들이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장래에 뭐가 되고 싶냐 묻기에 외교관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어른들은 하나같이 눈이 커지며 놀라곤 했는데 그럼 나는 실제로 외교관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해졌다. 그 순간 내 안에 간접적으로 굳혀진 성공의 의미는 위인, 즉 위대한 인물에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심지어 사회인이 되어서도 성공의 의미를 재정비하지 못했다. 그저 '위대한 인물'은 현실적으로 모호하게 '멋진 사람'으로 바뀌었고 멋진 사람이란 꾸준히 노력해서 큰 성공(돈, 직업, 인간관계, 아름다움, 건강 등)을 이뤄내는 사람, 개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삶을 사는데(그것만으로 안됨)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면서 그러한 기준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되는 것 자체도 힘든데 더 괴로운 건 채워져 있지 않다는 허탈감과 채워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하루하루 행복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멋지고 특별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은 강박에 허우적 되고 있을 무렵- 내게 한통의 메일이 왔다.


'꼭 작가가 되어야만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괴상한 제목의 메일을 보낸 사람은 내 독자이자 펜팔 친구였다. 그는 나보다 20년에서 30년 정도 더 산 사람인데 내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다소 직설적인 언어로 위로를 날려 답답한 마음을 뻥 뚫어주는 기묘한 해결사이기도 하다.


덧붙인 문장은 이랬다.

'꼭 작가가 되어야만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좋아하는 글을 읽고 좋아하는 글을 쓰면 되는 거지.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발견하면서.. 살면 되는 거지.'


그 문장을 읽는데 어릴 적부터 달려가던 화살표가 물안개 속으로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왜 그렇게 위인이 되려고 애쓰냐고 물었다. 왜 평범한 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햐냐고 꾸짖고 있었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서 행복하지 못한 건 아니라고.

지금 여기서 마음으로 웃을  있는 사람이라면 위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5월의 텃밭에는 상추만큼 평범한 것도 없다. 뜯으면 또 나고 또 난다. 너무나 평범하지만 나눠줄 행복까지 넘치는 상추. 그러니, 누가 상추의 삶이 위대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글. 강작(@anyway.kkjj)



:) 고마운 시선에 텃밭도 제 마음도 무럭무럭 자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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