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 전의 나와 나누는 대화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니까요.
무심코 바라본 창문 밖, 봄의 첫 목련이 피었습니다. 어김없이 하얀 꽃으로 인사를 건네는 나무를 바라보며 올해의 시작점에서 적어둔 나와 오늘의 나는 얼마나 닮아있는가를 곰곰이 되뇌게 됩니다.
나는 사실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꼭 흰 종이에 제목과 소주제를 쓰고, 칸을 그리고, 한 칸씩 잉크펜으로 할 일을 적고, 옆에 체크박스도 만들어 넣습니다. 마지막엔 잘 접어서 다이어리 포켓에 넣거나, 책상 벽에 붙여놓지요. 계획의 목적은 효율적으로 삶을 나눠서 쓰는 것이지만, 비효율적 이게도 나는 행위 자체에 대한 애정이 목적보다 클 때가 더 많아요.
12월 31일에 신년 계획 세우고, 각 달의 마지막 날에 그다음 달의 계획을 세웁니다. 재정용 계획표와 작은 하드 보드판에 다이어트를 위한 계획표도 만들어놨죠. 홍대의 호미화방에서 애뉴얼 플래닝 포스터 달력을 얻게 되었는데, 여기에 모든 계획을 합쳐서 또 한번 정리할 때 무척 재밌었습니다. 2월쯤에는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계획표로 유명해진 만다라트 기법을 알게 되어서 파워포인트로 작성해서 노트북 바탕화면으로도 설정해놨어요. 도서관에 갈 때마다 새로운 계획표를 세우는 방법에 관한 책을 검색해보곤 합니다. 하지만 예상하다시피, 이렇게 만들어놓은 무수한 칸들 중에 지금까지 꾸준히 채워진 것들은 몇 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칠해지는 칸도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겨우 채우는 칸들도 있습니다. 몇 가지는 삼일을 넘지 못하기도 하지요.
처음엔 이런 계획표와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감이 커서 스스로를 너무 한심하게 바라보고, 자책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이럴 바엔 계획이나 목적 같은 것 정하지 말고,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란 생각도 했었지요. 그런데 빈 다이어리만 보면 펜을 움직여 계획을 세우는 습관은 쉽게 없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작은 타협을 시작했습니다. 하고 싶고, 되고 싶고, 해야 하는 일을 적는 것은 돈이 들지도, 전혀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쭉 즐겁게 하던 대로 하고, 칸들의 약속을 한번 이상은 꼭 지키기로 말이죠.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흐르던지 상관없이.
아직까지는 내 인생이 칸속의 이야기들과 항상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지만, 이따금씩 현실과 계획의 접점이 생길 때면 참 즐겁습니다. 매일이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번, 반년에 한 번씩이 연결되어 선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