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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다른 태국> 시간의 틈새

태국 페차부리 | 1

by 강라마

페차부리의 첫날, 햇살이 천장을 뚫고 내리는 동굴 안에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카오루앙 동굴(Khao Luang Cave)

산 속 깊이 숨겨진 듯한 이 동굴 사원은, 태국의 오랜 시간을 품고 있었다.

동굴 안에는 수십 개의 불상이 놓여 있었고,

입구 초입 어두운 공간에는 셀 수 없는 박쥐 떼가 천장에 매달려 숨죽인 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이 동굴의 주인이었을 터, 축축한 어둠 속에서 고요히 자신들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빛줄기는 정지된 듯한 시간 속을 가르며 불상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 빛을 받은 부처의 얼굴은 고요했고, 어쩐지 따뜻했다.


라마 4세, 몽쿳 왕이 이곳에 마음을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프라 나라이 왕궁 건설을 맡았던 추앙 브라야 수리야웡세에게 이 동굴 사원을 복원하라 지시했고,

그 이후 동굴에는 라테라이트 석상들과 수많은 불상이 들어섰다.

전해 듣기로는 라오족 장인들이 '카오 루앙 끄릿카라나'라 불리던 이곳에 조각을 새겨 넣었다고도 했다.

시간이 지나, 라마 5세는 직접 이곳을 찾아 그 조용한 기운을 느꼈다고 한다.

사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감동도 있었지만, 내겐 그보다 '빛'이 강하게 남았다.

마치 동굴 전체가 하나의 카메라 옵스큐라처럼 느껴졌다.

천창에서 쏟아지는 빛은 고요를 깨지 않고, 오히려 그 안을 더 깊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2025.06-07 | Thailand_Phetchaburi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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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을 나와 우리는 바닷길을 택했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Tilt Pole Beach Tanod Noi 해변 근처,

바다 위로 삐죽삐죽 솟은 기둥들이 이상한 감정을 자아내는 장소였다.

기둥 주변엔 부서진 콘크리트, 벽돌과 철근이 뒤엉킨 폐허들이 해변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누군가 무언가를 짓다 포기한 듯한, 혹은 무너진 흔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폐허가 자연과 함께 부서지는 그 풍경은 묘하게 아름다웠다.

사진으로 담기엔 더없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지역의 경제가 한때 무겁게 꺼졌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스쳤다.

실제로 이곳 '틸트 폴 비치' 주변의 폐허들은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IMF 사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시 태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으면서,

페차부리 해안 지역에 추진되던 수많은 개발 프로젝트들이 갑작스럽게 중단되거나 포기되었던 것이다.

바다 위와 해변 곳곳을 차지한 부서진 구조물들은

바로 그때 지어지다 만 건물이나 버려진 시설들의 씁쓸한 흔적이었다.

이곳의 폐허는 단순히 오래된 건축물이 아닌, 태국 경제의 격동기를 보여주는 독특한 풍경이기도 했다.

파도가 기둥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마치 시간도 그 틈으로 새어나가는 느낌이었다.

해가 살짝 기울 무렵, 우리는 근처의 또 다른 해변으로 향했다.

2025.06-07 | Thailand_Phetchaburi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2025.06-07 | Thailand_Phetchaburi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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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d Puek Tian

바다 안으로 전설 속 인물들이 돌연 솟아 있는 이곳은, 분명 현실인데 비현실 같았다.

아내가 살며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건 학교에서 배운 동화 속 인물들이야."

찾아보니, 태국 국민 시인이자 19세기 태국 문학의 위대한 걸작으로 평가받는

장편 서사시 <프라 아파이 마니>를 쓴 순톤푸(Sunthorn Phu)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라 했다.

거대한 해마귀 여인, 인어, 악기를 든 소년...그 모두가 바다 위에 실제 조각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조각상들은 단순한 예술 작품을 넘어,

태국인들이 사랑하는 문학 작품의 한 장면을 현실 공간에 구현해 놓은 문화적인 상징이기도 했다.

물결은 끊임없이 인물들을 넘실거렸고, 조형물과 바다의 경계는 모호했다.

이 해변은 바다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였다.

누군가가 바다에 직접 글을 새겨놓은 것처럼.

2025.06-07 | Thailand_Phetchaburi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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