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사서함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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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_am11:56

by 강민선


모두들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별표도 그리고 밑줄도 쳐가면서. 이럴 땐 눈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더 이상 쓸 것도 그릴 것도 없을 때쯤 과장이 말했다. “강선생이 합시다.”


강선생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한숨 돌리며 고개를 들었고, 유일하게 고개를 들지 못한 강선생이 바로 나다. 결국, 나구나. 나였구나. 회의 시간이면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메모만 들입다 했었다. 쓸 게 없으면 그림도 그리면서. 그런다고 담당 업무가 덜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과장의 눈을 애써 피했다. 내심 조마조마하기는 했지만 내가 맡은 다른 일도 있고 육아휴직 중인 팀장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석한 회의이기 때문에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가 새로 맡은 일은 근린공원에 작은 도서관을 짓는 것이었다. 이 문장을 쓰고 나서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다. 잘못 쓴 건 아닐까. 너무나 허구 같아서 내가 써 놓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도서관을 짓는다고? 근린공원이라는 명칭이 있다지만 그냥 동네 뒷산이다. 숲길로 이어진 작은 산책로로, 한 바퀴를 다 돌면 사십 분 정도가 걸린다. 언덕 꼭대기에 오르면 구립도서관과 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운동기구 몇 개가 있을 뿐이다.

“전국적으로 숲속 도서관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자료 모으는 것부터 해 놔. 예산을 따올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고. 기업이나 환경단체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는지도 좀 알아보고.”

받아 적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현실감각이 없었다고나 할까. 무슨 드라마 대사 같았는데 나는 고생하는 신입 역할이었다. 과연 우리의 주인공은 동네 뒷산에 도서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도서관 뒷산이니까 가끔 올라가서 둘러보고 와. 혼자 가기 무서우면 같이 가고.”

혼자 가기 무서운 곳에 도서관이라니. 담당자가 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이 다녀야 하겠는가.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아직 시작하지 않은 소설을 맞닥뜨리는 일 같았다. 아무것도, 제목조차 모르지만 어쨌든 거기, 내 앞에 무언가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나에게 온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맡겨졌건 어쨌건 내 앞에. 그게 얼마나 어려울지 지금으로선 감이 잡히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소설로 집을 짓는 것과 실재의 도서관을 짓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힘들까.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고요한 숲속 어딘가에, 이따금 산책을 즐기는 여유로운 사람들의 시선 어딘가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면……


자료부터 찾아봐야겠다.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는 숲속의 앙증맞은 도서관들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상주하는 사서가 많지 않을 텐데 책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오며가며 무인카페처럼 차를 마시는 게 가능할지. 어떻게 하면 자연과 어우러질지. 쓰레기장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지. 거미줄에 점령당한 벌레 소굴이 돼버리는 건 아닌지. 그렇다 하더라도 도서관이 지어지기는 할지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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