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일 년 전, 우연히 마주친 마라톤의 감격 속에 왈칵 눈시울을 붉혔던 그 현장에서 내가 주자로 뛰게 되는 날. 5km는 아직 '마라톤'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하지만, 그 감동을 내게 주었던 '비엔나 시티 마라톤'에 내가 참가자로 빈 시내를 달리게 되는 것만으로도 뭉클한 날이다.
5km가 나에게 쉬웠던 것은 아니지만, 야외에서도 5km를 달려보고 러닝머신에서 6km 이상을 달려 준비했던 나로서는 심리적인 부담은 없었다. 그저 남편과 함께 즐겁게 첫 마라톤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낭만적인 비엔나의 도시를 마음껏 달려보고 싶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4월에 갑자기 여름처럼 따뜻해졌다가, 우리가 대회에 참가하는 주에는 갑자기 비가 오고 0도까지 떨어지는 겨울 날씨가 이어졌다. 대회 당일에도 비 예보가 있었고 낮 최고기온이 7도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가 뛰기 시작하는 오후 6시에는 비가 그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곳에 2년 넘게 살아보니 동유럽은 비가 억세게 쏟아지거나 종일 내리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추위에 대비할 경량패딩과 털모자를 준비했다.
남편과 나는 아침 일찍 비엔나로 향했다. 마라톤 참가 소식을 듣고는 자진해서 아이들을 맡아주겠다고 해주신 교회 분이 계셨다. 토요일 아침,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맡기러 갔는데 정성스럽게 김밥과 과일까지 직접 싸주셨다. 분에 겨운 복을 누리며 차 안에서 김밥과 간식을 먹고 번갈아 운전을 하며 잠도 조금 잤다. 비엔나는 집에서 5시간 반 정도 거리인데, 하도 주변 나라를 운전하고 다녀서 이제 이 정도 거리는 어렵지 않았다. 도착했을 때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날도 추웠기에 남편과 나는 간단히 숙소에서 쉬며 체력을 아꼈다. 5km 마라톤 출발시간은 오후 6시여서 5시쯤 비엔나 시티마라톤의 시작점인 시청사 앞으로 갔다. 아직도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청 공원은 우리가 작년 겨울, 비엔나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기 위해 왔던 곳이다. 고풍스러운 시청사 건물과 넓은 공원에 펼쳐진 수만은 크리스마스 마켓들, 빙판 스케이트장, 반짝이는 루미나리에 장식과 관람차, 따끈한 와인과 음식들... 환상의 동화 같았던 그곳이 오늘은 전혀 다른 곳으로 변해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의 시청과 마라톤 대회의 시청
마라톤을 위한 여러 본부의 텐트가 쳐져있었다. 안내소, 배번호를 나눠주는 곳, 순위권 선수들이 메달을 받는 곳 등등. 먼저 배번호표를 받았다. 내 이름과 남편 이름이 영문으로 새겨져 있는 걸 보니 뭔가 뿌듯했다. 내가 정말 여기서 뛰게 되는구나. 우리는 배번호를 받아 옷에 붙이고 나머지 짐을 보관 가방에 넣었다.
아쉽게도 파란 하늘 대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출발지점으로 가서 몸을 풀기도 전에 이미 겉옷이 축축해졌다. 추워서 차가운 손을 비비며 스트레칭을 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출발지점에 모여 짧은 거리를 오가며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같이 온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신나게 몸을 풀었고, 흥겨운 음악과 함께 진행자가 남은 시간을 알려주며 흥을 돋우었다. 비가 와도 이 즐거운 설레는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올해도 비엔나 시티 마라톤 기념 티셔츠가 있었는데 입고 있는 사람은 보기 어려웠다. 작년에 내가 처음 마라톤 풍경을 마주했을 때는 대부분 사람들이 파란색 기념 티셔츠를 입고 달렸는데, 오늘은 각자 경량패딩, 바람막이, 방수 점퍼를 껴입고 헤어밴드, 비니, 캡모자를 쓴 사람들까지 알록달록 개성이 넘쳤다.
수 천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출발선에 섰다. 진행자의 목소리와 함께 모두 목청 높여 카운트다운을 했고 3, 2, 1! 에 맞춰 달리기 시작했다. 그즈음에는 문제없이 갤 거라는 나의 긍정적인 예견과 달리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출발선에서 대기 중인 참가자들
근거 없이 낙관적인 구석이 있어서, 잘 될 거라고 믿고 평소 걱정을 별로 안 하는 편이다. 하지만 날씨 걱정을 했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날이 너무 추웠기에 바람막이와 경량패딩을 입긴 했는데 방수가 되는 옷이 아니어서 다 젖었다. 예보와 달리 6시가 넘어서도 비는 계속 왔고, 달리는 동안에도 보슬보슬 계속 내렸다. 방수가 안 되는 나의 경량패딩은 이미 젖어 축축해졌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조금 달리다 보니 운동화가 흠뻑 젖어버렸다. 남편과 나는 축축하고 무거운 신발과 옷을 끌고 인파 속을 달렸다.
2km 지점 즈음 되자 남편은 점점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회사 다니느라 바빠서 달리기 연습을 한 번도 못하고 그저 나를 위해서 참가해 준 셈인데, 안 뛰던 사람이 갑자기 이 악조건에서 뛰려니 숨차고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만 더 힘내, 잘하고 있어!"라고 응원도 하고, 껌도 쥐어주고, 허리도 밀어주고 했지만 3km 즈음되자 남편은 걷다 뛰다를 반복했다. 그동안 나름 열심히 준비한 나로서는 여기서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이게 무슨 대단한 대회라고 남편을 버리고 기록을 세울 것도 아니었다. 남편이 걸을 때면 나는 제자리 뛰기도 하고 뒤로 뛰기도 하고, 동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었다. 어쩌면 나는, 걷는 남편 덕분에 세상 여유롭게 이 대회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리 곳곳에는 러너들을 응원해 주는 무리들이 있었다.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사람, 러너에게 하이파이브를 해주는 사람, 여럿이 줄지어 파도타기를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적극적으로 하이파이브를 했고, 손을 높이 들어 뜨거운 응원에 화답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을 조건 없이 응원해 주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또 울컥했다. 작년 이곳에서 내가 처음 보는 러너들을 향해 보냈던 뜨거운 박수와 함성을 이번에는 내가 받는구나. 시간의 흐름, 상황의 순환이 어쩔 때는 그저 신기하고 감사할 때가 있다.
거리의 응원자와 힘을 받아 달리는 참가자들
그런 감동의 시간을 거쳐 우리는 결승점을 통과했다. 연습한 것이 무색하게 평소보가 훨씬 느린 기록이 나왔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편이 나를 위해 함께 달려주었고 나란히 함께 해냈다는 것, 모르는 이들의 조건 없는 응원을 받았다는 것, 언젠가 나만의 사연으로 마라톤에 참가해 보겠다는 다짐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결승점을 지나자 메달과 간식과 비옷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메달을 걸고 함께 사진을 찍고 바로 우비를 입었다. 내가 상상했던 아름다운 곳에서 멋지게 달리는 모습과는 달리, 비 맞은 생쥐가 되어 추위에 벌벌 떨고, 커다란 우비를 걸치고 축축한 운동화로 발걸음을 옮기며 숙소에 돌아가야 하는 신세였지만, 아마 이 고생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우리의 추억거리로 남겠지.
결승선을 통과해 해맑은 남편. 나눠준 우비가 기념 커플룩이 되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며 몸을 녹였다. 그리고 축축해진 운동화를 라디에이터에 올려 말렸다. 신발이 금방 마르지 않아 젖은 운동화를 신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축축한 운동화를 신어도 따끈따끈한 피자와 콜라는 정말 맛있었다. 비 예보가 있었는데도 방수재킷도, 갈아 신을 신발도 준비하지 않은 초보러너의 첫 대회였다. 엄마 없이도 잘 놀았다는 두 딸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줘야겠다. "엄마 아빠 메달 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