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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정 Oct 09. 2024

러너의 대열에 합류한 순간

그 몸짓 하나로

10km 마라톤 대회를 딱 한 달 앞둔 토요일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준에 벌써  7~8km 거리는 뛰어두었어야 하는데, 감기를 오래 앓아서,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비가 계속 내려서 등등의 이유로 진도가 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지난주 겨우 5km를 힘겹게 뛰었다. 이제 4주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나의 계획대로라면 오늘 적어도 6.3km까지 뛰어두어야 다음 주에 또 부담 없이 차근차근 거리를 늘려갈 수 있었다.


9월 말이었지만 폴란드는 이미 초겨울 날씨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집에서 따습게 빈둥대며 영화나 보면 제일 행복할 그런 날이었다. 휴... 이 놈의 숙제. 해치우자! 러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운동화끈을 조여매고, 밖은 추우니 현관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사두었던 따뜻한 헤어밴드를 처음 착용했다. 귀가 조금만 시려도 두통이 오는 편인데, 그래서 날씨가 쌀쌀하면 달리기 쉽지 않은 몸이라는 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1.6km 떨어진 곳에 자메크 토파즈라는 큰 공원이 있다. 예쁜 산책길과 호수와 실개천과 숲이 어우러진 대지다. 보통은 차로 그곳에 가서 호수를 몇 바퀴씩 돌며 달리기 연습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집에서부터 달려가기로 했다.


정말 나오기 싫었지만 막상 나오니 붉게 물든 노을이 정말 예뻤다. 적당히 차가운 저녁공기도 상쾌했다. 제법 쌀쌀했지만 헤어밴드로 귀를 가리니 오래 달려도 귀가 시리지 않았다. 어제 유튜브에서 배운 대로 초반에 속도를 내지 않고 서서히 달렸다. 처음부터 지쳐서 끌려가듯 달리느니 에너지를 아껴두었다가 오히려 마지막에 힘껏 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하늘


공원 입구에 거의 다 왔을 즈음, 나의 반대편에서 러너의 복장으로 힘겹게 달리며 다가오고 있는 덩치 큰 아저씨가 보였다. 그동안 달리면서 러너와 마주친 적은 많았지만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러너가 이렇게 반가운 동지로 느껴진 건, 그리고 인사를 하고 싶다고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고, 아저씨는 한 손을 살짝 들어 내게 인사를 건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이루어진 러너 간의 이 짧은 인사가, 나를 한 순간에 '러너'라고 당당하게 느끼게 해 준 첫 순간이었다. 이제야 나도 진정으로 러너 대열에 합류하게 된 느낌!


나는 작년에 하루 5분 달리기로 시작해 조금씩 동네와 여행지를 달리기 시작했고, 올봄에 고작 5km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대회 이후 또 몇 달을 쉬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스스로를 러너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다른 러너들이 말하는 대로 10km를 달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를 '달리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 순간을 기대했다. 그런데 예고 없이 그 순간이 불쑥 찾아와 버린 것이다. 동네 러너와의 동지애 인사로!



공원에 들어오니 내가 늘 돌며 달리기 연습을 하던 호수는 벌써 겨울 루미나리에 준비로 막혀있었다. 너무 아쉬웠지만, 그 덕분에 토파즈 공원을 구석구석 누비다가 새로 조성한 산책길도 처음 가보게 되었고, 아름다운 유럽의 결혼식 풍경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내가 계획한 것이 막혀도 그 덕분에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걸, 달리기를 통해서 또 배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뜨거운 노을이 하늘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토파즈 공원의 호수와 결혼식 풍경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하늘


계획한 대로 점점 더 빠르게는 달리지는 못해도, 초반에 에너지를 아껴 쓴 덕분에 중 후반에도 비슷한 페이스로 달릴 수 있었고, 막판 스퍼트를 올릴 수 있었다. 내가 목표한 6.3km를 지나니 갑자기 에너지가 샘솟아 두 다리 가볍게 넓은 보폭으로 속도를 올렸고, 집 앞에 다 왔을 때는 6.9km여서 7km를 채우기 위해 마지막 100m를 더 뛸 때는 전속력을 냈다.


달리는 중 수시로 스트라바 앱으로 내 페이스를 확인하며 쳐지는지 아닌지, 속도를 낼지 말지 파악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게 재미있었고, 스스로 쫌 멋졌다. 이제야 페이스와 기록에 대해 조금 알게 되는 듯했다.


쉬지 않고 7km를 달린 신기록을 세운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성실하게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걸 굳게 확인해서 행복했던 날이었다. 물론 나는 잘 미루고 게으름도 잘 피우지만, 결국 나만의 속도대로 차근차근 준비하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다가오는 10km 마라톤이 긴장되거나 걱정되지 않는다. 나는 5km 대회 때처럼 성실히 준비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해 즐겁게 즐기고 있을 것이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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