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마침 10월 5일에 지금 살고 있는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LG의 후원으로 열리는 5km, 10km 마라톤 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연습 상태로는 10월 초에 10km를 달리긴 어려울 것 같았지만 10km 대회 전 5km 대회를 중간점검차 뛰어보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봄에 5km를 수월하게 달렸던 격력도 있겠다, 이번에는 좋은 기록을 내는 데 목표를 둬볼까 싶기도 했다. 1,2,3등에게 상금까지 걸려있는 무료대회였다.
러너인 언니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순위에 들려면 20분 안에는 뛰어야 될걸?" 헉 20분이라니. 거의 그 두 배가 걸리는 나인데. 그렇지만 나는 "한국 기업 대상이고, 여자들은 나 같은 아줌마들일 텐데, 그렇게 잘 달리는 사람이 있을까?"라며, 순위 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위권으로 달려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이 있었다.
대회 전에 나의 첫 러닝 메이트와 매주 공원을 3km씩 달렸고, 대회 직전에는 리허설 겸 5km를 달렸다. 그리고 혼자서 달릴 때는 집 주변을 7km까지 달리며 나의 거리 신기록을 세웠다. 5km는 자주 달렸고 7km까지 달려본 사람이니 5km 대회는 즐기고 오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다.
대회 당일은 정말 추웠다. 주차장을 헤매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이미 진행자와 음악에 맞춰 몸을 풀고 있었고, 배번표를 받는 줄도 무척 길게 늘어서있었다. 예상과 달리 한국인보다 폴란드 사람이 더 많았다. 한국기업 대상이지만 폴란드 현지 직원들도 무척 많았던 것이다. 한국 아줌마들은 거의 없었다. 열정 넘치는 폴란드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대회 전까지도 나의 기록은 별로 빨라지지 않았기에 상위권 욕심도 없어졌지만, 달리기 영상에서 배웠듯이 초반에 천천히 나의 페이스대로 에너지를 아끼며 달리다가, 후반에 점점 속도를 내고 막판 스퍼트를 내며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힘차게 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러닝메이트에게도 천천히 우리 페이스대로 가다가 마지막에 속도를 올려 달리자고 했다.
기념 티셔츠를 입고 추위에 몸을 풀고 있는 참가자들
진행자와 함께 다 같이 신나게 몸을 풀고 출발선 앞에 섰다. 아직 추웠지만 신나는 음악과 흥분된 사람들 사이에서 열기가 달아올랐다. 출발 신호음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나의 페이스대로 천천히 가려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빨리 뛰어가는 게 아닌가. 평소보다 빠른 페이스였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우리를 추월해 가는 느낌이었다. 굳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시작부터 거의 꼴찌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오버페이스로 나가떨어지지 않고 차근차근 밀고 나가 막판 스퍼트를 올리리'라고 재차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2km 정도부터 힘들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수월하게 달려줘야 하는데, 이상하다? 점점 숨이 가빠오고 다리가 무거웠다. 3km 정도는 왔나 싶었는데 아직도 2.4km, 2.6km... 너무 힘들었다. 에너지를 비축했다가 막판 스퍼트를 올리기는커녕 지금도 나의 최선이다. 끌려가듯 헉헉 달리면서 내내 생각했다. '10km는 못 달리겠다.' '5km도 이렇게 벅찬데 10km를 어떻게 달려...' '10km는 못 달려.' 한심하지만 달리는 내내 했던 생각이 그거다. 중간 점검차 달리려던 5km 대회에서, 좋은 기록이나 내보자며 거만하게 신청했던 대회에서 나는 그렇게 쫄보가 되어버렸다.
당연히 막판 역전은 없었다. 나의 상상은 마지막 1km에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힘차게 달려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일정한 속도로 결승점까지 다다르기 벅찼다. 이미 많은 사람은 레이스를 끝낸 것 같았다. 막바지에는 더 이상 뛰지 못하고 걷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그래도 우리는 한 번도 걷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달려간다는 것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마지막 결슴점이 보이고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는 막판 스퍼트를 올렸다. 그때 부부 한 쌍을 제쳤다. 훗.
기록은 31분 34초. 페이스는 7분 07초. (참고로 1등의 기록은 15분이었다고...)
아마 5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여서 시간이 단축된 것 같고, 페이스는 역시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출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평소보다 오버페이스를 한 것이 힘들었던 원인이었던 것 같다. 늘 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정말 느리게 달리던 나였으니 조금만 빨리 달려도 숨이 찼을 것이다. 날이 추워서 그날 컨디션이 안 좋았을 수도 있다. 추운 날씨에 배번표를 받기 위해 30-40분을 줄 서서 오들오들 떨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어제, 그제 잘 달렸다고 해서 오늘의 달리기가 수월한 것은 아니라는 걸 배웠다. 오늘은 오늘의 컨디션으로 다시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하는 달리기가 있을 뿐.
경기를 마치고 무료 쿠폰으로 제공되는 피자와 커피를 받기 위해 줄을 섰는데, 이미 경기를 마치고 줄을 선 사람도 무척 많았지만 우리 뒤로도 결승점으로 꽤 많은 들어와서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경기에 참가했던 다른 지인들이 경기 후 다리가 너무 아파 시름시름 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더 뿌듯했다. 천천히 달렸을지언정, 5km를 쉬지 않고 달려도 이제 털끝 하나도 아프지 않은 우리인걸!
피자와 커피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땀이 식어 더 추워진 우리는 결국 국밥집으로 향했다. 대회가 열렸던 LG공장 근처에 정말 맛있는 찐 한국식 국밥집이 생겼는데 오늘이 바로 제격인 날이었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싶은 추운 몸을 이끌고 국밥집에 가서 뜨끈한 순대국밥을 먹었다. 캬~~~ 이맛이지!! 뜨끈한 국물, 보들보들한 순대와 고기, 시원한 겉절이와 총각김치, 부추김치에 모든 피로와 추위가 싹 날아갔다.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몸이 따뜻해지니 10km를 앞두고 긴장했던 나의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오늘은 5km도 이렇게 힘들었지만, 오히려 겸손히, 성실하게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결국 나는 차근차근 이루어갈 테니. 쫄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