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러너스 하이'인가?
런린이가 처음으로 11km를 달린 날
10km 마라톤 D-14.
목표한 대로라면 오늘까지 9km는 뛰어두어야 한다. 다음 주말까지 10km 뛰어두고 마지막 주는 서서히 체력조절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어제 달리려 했으나 토요일이라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잠도 부족했는지 체력이 방전되어서 뛸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는 체력을 관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핑계로 또 쉬었다. 대신 밤에 사우나에 가서 뜨겁게 몸을 풀고 땀을 빼고 왔더니 꽤 개운해졌다.
일요일이니 이제 이번주 목표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아직 러닝머신에서 7.7km밖에 뛰지 못했기 때문에 더 미루면 계속 불안감에 시달릴 것이다. 나에게는 러닝머신보다 야외 달리기가 좀 더 어렵게 느껴져서 오늘은 꼭 밖에 나가서 9km를 달리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차가운 날씨에 매서운 바람까지 휘몰아쳤다. 헤어밴드로 귀를 따뜻하게 가리고 나가볼까도 싶었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아서자. 이러다 감기 걸린다. 다시 헬스장에 가서 뛰기로 했다. 이번에는 핑계가 아니고 진심으로, 지금부터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체력을 관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러닝복으로 갈아입고 헬스장에 들어섰다. 오늘은 9km까지 달릴 작정이므로, 유튜브를 보면서 10km 러닝을 위한 동적 스트레칭을 철저히 했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러닝머신에 올라 느린 속도로 시작했다. 이전에 러닝 훈련에 대해 배울 때, 일주일에 한 번은 30초 안에 최고속도를 올리며 반복하는 훈련, 그리고 한 번은 아주 천천히 달리며 자기 러닝 거리의 한계치를 늘리는 훈련을 하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오늘은 아주 천천히 달리며 나의 최대 거리를 갱신하는 날이다. 느리게, 오늘 9km까지 가는 거야!
달리기가 편해지면서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7.5km/h로 시작해 8km/h, 막바지에는 9km/h까지 올려 달렸다. 이제 3km 거리까지는 힘들지 않게 뛸 수 있다는 사실에 흐뭇했다. 5km 까지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달리면서 생각했다. 오늘 아예 10km까지 뛰어두자!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통 목표한 거리를 채우면 마음이 편해져서 힘이 좀 더 샘솟는다. 오늘도 처음 목표했던 9km가 넘었을 때 속도를 더 올릴 수 있었고 10km를 채워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평소에 뛰지 않았던 거리여서인지 왼쪽 발목과 오른쪽 무릎이 아파왔다. 왼쪽과 오른쪽의 아픈 부위가 다른 걸 보니 자세의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것일까.
10km가 넘었는데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아니 내가 10km를 뛰어도 숨이 차지 않고 이렇게 멀쩡하다니! 보통 목표치를 채우면 러닝머신을 끄고 주저앉아 헉헉대던 나였는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맘 같아서는 13km도 어쩌면 15km도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이렇게 꾸준히 뛰면 하프마라톤도 가능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난생처음 들었다. 하프 마라톤은 감히 상상도, 범접도 하지 못할 세계라고 생각했던 내가 말이다. 불과 일주일 전 5km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는 내내 헉헉대며 10km로 대회는 못 뛸 것 같다고 쫄보가 되었던 내가 말이다.
좀 더 달려서 나의 한계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발목과 무릎이 찜찜한 신호를 보내왔다. 나의 체력은 아직 남아있는데 부상이 걱정된다. 여기서 무리하면 오히려 꽤 오랫동안 달리지 못할 수도 있어. 아니, 지금 이 정도 통증은 괜찮을 거야. 조금만 더 달려보자. 달리는 내내 번민에 휩싸였다. 어떻게 해야 덜 아픈지 충격을 줄이는 자세도 취해보고, 속도를 확 낮춰보기도 하고,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다리가 좀 적응을 했는지 아까보다는 통증이 덜했다. 하지만 부상이 걱정돼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이번에 참가하는 대회가 딱 10km가 아니라 쿼터 마라톤이어서 10.55km였다. 짧게라도 달리기 연습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마지막 500m가 얼마나 길고 힘든지. 그러니 오늘은 11km까지 달려두자. 그러면 나는 이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달리기 연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나는 11km까지만 채우고 러닝머신을 멈췄다. 그리고 10분간 아주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해 몸을 풀어주었다.
러닝머신에서 내려오는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 10km를 뛰는 여자야!'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겠지만, 키 크고 몸 좋은 서양인들 사이에서 그저 왜소한 동양인으로 보일지 모겠지만, 내 어깨에는 뽕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나 10km를 뛰는 여자가 되었다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멋졌다. 어깨와 팔에도 잔근육이 있는 듯 보였고, 엉덩이와 허벅지의 군살이 쏙 빠진 것 같았다. 갑자기 근육이 붙고 살이 빠질 리 없는데 말이다. 낯선 나라에 살면서 전과 후가 달라지는 경험을 두어 번 한 적이 있는데, 아이들과 어렵고 험난한 여행을 잘 헤치고 무사귀환 했을 때나, 스위스 라인강 수영에 도전했다 빠져 죽을 뻔했을 때였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그 짜릿한 맛을 보았다.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
나는 작년 봄 5분 달리기로 러닝에 입문했다. 그때는 7~800m만 뛰어도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한참 연습해서 겨우 1km를 쉬지 않고 달려보고, 겨우 15분을 채워보고 했던 나였다. 나를 달리기의 세계로 이끈 언니가 하프 마라톤에 참가하고, 평소 아침 조깅으로 6~7km를, 종종 10km씩 달리는 걸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한 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뛸 수 있는 거지?'라는 의문만 가득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11km를 달렸다고!? 1시간 25분을 쉬지 않고, 그것도 이렇게 여유 있게 달렸다고?!
집에 와서 러닝에 대한 영상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스친 '러너스 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 어쩌면 내가 느낀 그건 러너스 하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도해 본 적 없는 최장거리를 힘들지 않게 뛰고, 거울에 비친 나의 러닝 모습이 멋져 보이고, 15km도 뛸 수 있을 것 같았던, 감히 하프마라톤도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기분이 바로 '러너스 하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아직도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 숙제처럼 하는 사람이었는데.
달리기는 늘 내게 힘들고 벅찬 것이어서 '러너스 하이'를 느끼는 순간이 올까? 하는 생각만 잠시 했었고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거나 기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많이 뛰어야 5km 정도였기 때문에 러너스하이를 느끼기에 충분치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지 않아도 때가 되면, 내 몸에 차곡차곡 성실히 시간과 땀이 쌓이면 선물처럼 찾아오는구나. 처음으로 '달리기가 쉽고 재미있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선물처럼 주어지는구나.
그것이 러너스 하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만약 그때 멈추지 않고 더 달렸다면 얼마나 달릴 수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아마 15km도 거뜬히 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기분에 도취되지 않고 몸의 통증을 듣고 멈춘 것 또한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닝 후 무릎과 발목 통증은 금방 나았지만, 발톱에 멍이 들어 꽤 오래 아프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야외훈련이다. 대회가 열리는 날은 헬스장처럼 온화한 온도에 일정한 속도가 아닐 테니. 차가운 공기에 바람도 있을 것이고, 다른 러너들의 페이스의 휘말릴지도 모르니. 아니 어쩌면 러너들과 함께 뛰며 에너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드레스덴 강가의 멋진 풍경들을 보며 더 행복하게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11km를 달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남은 시간 차근차근 야외 환경에 적응하며 즐겁게 훈련을 이어나가리라. 잘했어 강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