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같은 생각을, 석표 본인은 못 오더라도 친구 몇 명에게 알리기라도, 전화라도 한 번 해볼까?”
영순 언니에게 석표를 보내달라는 억지(!)를 부린 언니와 현숙이 큰 소리로 옥신각신하자, 두 오빠가 끼어드는 가운데 둘째오빠가 휴대폰을 들었다.
“오빠! 하지 마!”
현숙이 휴대폰을 꺼내는 둘째 오빠를 급하게 제지하며 소리쳤다.
“가마이 있어봐라. 나도 그 정도 권리는 있어! 석표 군수 후보경선에서 뛸 때 내가 얼마나 표 몰이 많이 해줬는지 알아?”
둘째 오빠와 현숙의 입씨름이 가열되자 언니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렸다.
“기다려봐라. 내가 영순이한테 전화했으니 좀 있으면 전화 올 끼다. 석표한테 물어보고 전화준다켔다.”
사실 언니와 오빠들은 석표네와의 악연에 대해 기껏 뽕나무 밭 돌려받는 과정에서 있었던 법적인 분쟁 정도만 알고 있었다. 소송에서 이긴 뒤 어느 날 가족모임에서 누군가 농담처럼 ‘엄마의 억지’가 승리를 가져왔다고 했다. 엄마의 집념과 끈기를 치켜세우는 우회적 표현과 처음부터 산밭을 일궈 뽕나무를 심었던 석표네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논리가 뒤섞인 발언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백팔십도 다른 환경에서 악전고투하는 자식과 형제들에게 더한 충격을 안기지 않으려는, 엄마와 현숙의 철통 보안이 가져온 폐해였기에, 현숙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친정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입이 간질거렸지만 엄마의 입장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고개 쳐들고 올라오는 독초를 내리누르곤 했다.
아무리 피를 나눈 형제라 하더라도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다 보면 같은 사안을 두고도 생각이 갈리고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현숙은 생각해왔다.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의 생존방식이기도 하니까.
그러한 가운데서도 가족 간 의견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던 부분은 석표네에 대한 아버지의 남다른 애정과 관심이었다.
'출근길 석표 아버지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운 채 읍내로... 서울 원호청을 수시로 오르내리던… 재조사를 위해 사고 당시 함께 복무했던 전우들을 찾아 다니느라 전국팔도를 헤매던….'
석표 아버지가 원호대상자가 되게 길을 열어준 아버지의 공헌에 대해서는 절대적 선(善)으로, 쇠기둥처럼 단단하고 확실하게 그들 뇌리에 박혀있었다.
“우리 아부지가 저거한테 우찌했노! 군수 신분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라도 백 번 천 번 조문할 의무가 있다 생각한다.”
“하모. 맞다, 당연하고말고….”
석표의 조문 의무에 대한 형제들의 의견이 대법원 상고심 선고공판만큼이나 확실하고 명쾌하게 통과되던 순간, 언니의 전화가 울렸다. 언니가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영순!’이라고 했다.
“어, 어, 어, 청사에 있다 말이제? 지가 바쁘면, 친구들 몇 명이라도 불러줬으면 카더라 켔나, 머라꼬? 너네 진짜 이렇게 할 거야? 내가 지금 너한테 조의금 받자고 이러나? 우리 형제들이 경고한다 전해라.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꼬!”
언니의 통화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맥이 빠져버린 듯,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어색하고 민망한 공기를 참지 못해 현숙이 응집된 분노의 문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엄마가 팔에 깁스했던 거, 석표 아버지가 엄마 덮치다 생긴 사고야.”
“뭐라구?”
엄마를 겁탈하려 했던 일, 뽕나무 땅 관련 판결이 났음에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아 엄마를 죽일 듯이 폭행한 일, 석표가 초등학교 동문회 날 종현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친구들조차 접근하지 못하게 왕따시킨 일, 자기 아버지를 유혹했다며 모함한 일, 그리고 시골집에서의 엄마와 종현의 영상 테러 등을 현숙은 낱낱이 까발렸다.
마치 댐 방벽의 작은 구멍이 점점 커지며 산을 무너뜨리고 마을을 덮치듯, 수십여 년을 묻고 지내온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절규에 형제들이 초토화되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구들장을 뚫을 기세로 바닥 한곳만을 보고 있는 큰오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현숙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언니, 저승사자 분장한 배우마냥 얼굴에 핏기라곤 없는 둘째 오빠….
엄마와의 암묵적 약속을 저버린 행위에 아차 싶었지만 이내 엎질러진 물이었다. 자신이 투하한 폭탄의 후폭풍을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어 현숙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멈춰 있던 회심곡을 다시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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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 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궂고 욕심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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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와 그런 사실을 은자 말하노!”
“흐흡!”
까무러칠 듯이 놀란 현숙의 등 뒤에 둘째 오빠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오빠의 눈은 사시(斜視)처럼 홱 돌아가 있었다.
“동생! 진정해라. 현숙이도 다 우리 생각해서 안 그랬겠나.”
큰오빠가 다가와 둘째 오빠를 달래는 사이, 빈소에서 죽은 듯 엎드려있던 언니가 바닥을 치며 울었다.
“직이야 돼! 직이야 돼, 직이야 된다! 우리 엄마 내 동생 불쌍해서 저런 인간들이 멀쩡히 활개치는 꼴을, 어떻게 견디며 살라꼬….”
언니의 통곡은 찰지게 곡을 하고 떠났던 외사촌언니로부터 학습된 듯 가사와 리듬이 절묘했으며, 한 차원 더 진화된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줄기들로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피부적인 촉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아-악!”
터질 듯한 분위기를 더 이상 참기 힘들었던지 둘째 오빠가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둘째 오빠의 저런 흥분을 이해 못 할 사람은 없었다.
동생이 이렇게 되기까지 직접적인 책임에서 피해갈 수 없는 장본인이 둘째 오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자취방에 둘째 오빠와 동생이 둘이 살고 있었으며, 오빠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외박하던 중에 일어난 사고였기 때문이다.
기어이 남은 세 사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은, 차 시동 켜는 소리에 이어 둔중한 5톤 화물트럭이 미친 듯한 속력으로 장례식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였다.
“오빠!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와 현숙의 다그침에 큰오빠가 황급히 옷을 걸치고 나가고, 이어 언니도 허겁지겁 뒤따랐다. 장례식장엔 현숙 혼자 남았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했다. 몸서리쳐지도록 무서운 상상이 일었던 건 귀신에 씐 사람마냥 뛰쳐나가던 둘째 오빠의 살기 띤 눈 때문이었다. 눈이 저렇게 돌아갈 때는 자신의 광기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때라는 걸 형제들은 모르지 않았다. 자랄 때도 크고 자잘한 사고를 많이 쳤지만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며 많이 완화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작년 이맘때 엄마가 입원한 병실에서 사소한 다툼으로 큰오빠를 공격하는 모습에 성질이 죽지 않았구나, 느꼈었다. 게다가 바로 어제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
동생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시골집으로 달려갔을 때 반려견 ‘몽돌이’가 목줄이 풀린 채 성성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엄마 돌아가신 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동생에게 현숙이 입양해서 안겨준 진돗개 종자였다. 헛간에는 몇 개월을 먹고도 남을 사료와 큰 고무통 안에 가득 담긴 물까지 넉넉하게 준비돼 있었다. 사료 부대 입구가 가위나 칼 등으로 깔끔하게 절단된 흔적에서 동생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경찰과 의사를 통해 동생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후, 형제들이 읍내 장례식장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였다. 몽돌이가 낑낑대며 그들을 좇았다.
“누가 데려갈래?”
큰오빠의 물음에 모두의 눈들이 ‘몽돌이’에게서 허공으로 무질서하게 흩어졌다. 바로 그때, 둘째 오빠가 앞으로 나섰다.
“여보! 안 돼! 우리 집 아이들 개털 알레르기 있잖아!”
둘째 올케의 다급한 소리를 뿌리치며 헛간으로 간 오빠는 천장에 걸린 철삿줄 뭉치를 내려 공구함에서 꺼낸 펜치로 툭툭 잘랐다. 그리고는 몽돌이를 불러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앞에 있는 사료를 입에 넣어주며, 태연히 몽돌의 앞발, 뒷발을 묶었다. 이어 벌어진 둘째 오빠의 행동에 모두는 비명을 지르며 숨거나 자신의 눈을 가렸다. 현숙만은 비명 대신 숨을 삼켰다. 몽돌의 얼굴에 겹겹의 비닐을 씌운 채 철사로 목을 칭칭 감기 시작했던 것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하고 잔인한 살육에 큰오빠가 말리려 다가갔지만, 공중 곡예 하듯 높이 솟구치는 몽돌이의 거센 저항과 흰자위만 번득이는 둘째 오빠에게 지레 겁먹고 돌아오고 말았다.
“주인 따라가는 게….”
갱년기 불면증을 앓으며, 현숙은 집을 떠나 잘 일이 있으면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들을 챙겨야 했다. 불안과 우울을 진정시키는 신경안정제와 곧바로 수면에 이르게 하는 수면제 졸피뎀이었다. 보통은 신경안정제만으로 잠이 들지만 큰 사건사고가 있거나 해외로 나갈 경우 두 종류 다 복용해야 할 때가 많았다. 어제도 글피도 정해진 양보다 서너 배나 많은 신경안정제를 복용했으나 잠다운 잠을 자지 못했다.
서슬 푸르고 괴기스러운 둘째 오빠의 눈빛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현숙은 가방을 뒤적거려 약을 꺼냈다. 오른손에 든 약병을 왼손바닥에 톡톡 내려치니 하얀 정제가 우르르 쏟아졌다.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은 뒤 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어 회심곡을 켠 뒤 빈소 바닥에 누웠다.
한반도에 핵전쟁이 일어났다며 사람들이 피난을 간다. 우왕좌왕하던 현숙도 간신히 행렬에 끼었다. 물결 같은 사람의 행렬이 어느 산으로 향하는 가운데, 이리저리 떠밀리며 그녀도 얼추 산 앞에 이르렀다. 놀랄 일은 산이 바로 그녀 친정 선산이었다. 그 속에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가족과 가까운 동네 사람들뿐이었다. ‘우리 소유’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한 인간의 말 따위가 먹혀들 분위기가 아니어서 곧바로 체념했다. 우선 살고 봐야겠기에 죽기살기로 산속의 동굴까지 뛰었다. 겨우 입구에 도착하여 몸을 막 안으로 구겨 넣으려는 순간, 번쩍! 하는 플래시가 터졌다.
눈이 부시게 밝은 빛이 점점 현숙을 향해 다가오며, 플래시 정중앙의 까만 점이 그녀를 포획했다.
“일어나 보세요!”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던 동굴 속과 환하게 불이 켜진 방 안의 시공간의 대비가 꿈인 듯 생시인 듯 혼란스럽고, 그 사이를 경찰들과 큰오빠와 언니가 어른거렸다. 수면제에 의해 몸체를 빠져나간 영혼이 지구궤도 밖으로 튕겨져 나간, 좀체 육신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유체이탈 현상에 놓여 있었다.
지구를 관찰하고 관장하며 조정하는 트러스(truss)구조물의 우주정거장이 거듭 도킹(docking)을 시도하지만 도무지 요철(凹凸)이 맞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