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수화 Dec 18. 2023

재벌이 되기까지-제 4화

미사리-2


어릴 적 생각에 잠기며, 자신이 헤엄쳐 건너온 바다를 묵묵히 내려다보는 동안 잠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생시인지, 여전히 정신이 몽롱하다. 멍한 눈에 들어온 것은 은빛 햇살뿐이었다. 소나무, 대나무, 갈대로 잔뜩 어질러진 배, 아버지, 어머니, 칠흑 같은 어둠, 차가운 바닷바람, 모두 온데간데없다.


 시계를 보려고 왼쪽 손목을 눈앞에 갖다 댔다. 뿌연 안개 속 시계바늘은 11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안경을 찾았다.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거려도 잡히지 않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11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시간 이 판국에 배고픔을 느끼다니….’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밥맛이 없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자 스스로가 하등동물처럼 여겨졌다. 

 햇살이 온통 차안에 들이찼다. 그늘이 왜 강 저편에 있는지, 시간과 그늘의 함수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발아래서 주워 올린 안경을 쓰고 시계를 보았다. 11시 아닌, 오후 3시였다. 


 밖으로 나가 간단히 허기라도 면할까 생각했지만 나가고 들어올 때 주차요금 정산을 해야 하고 다시 주차증을 받아야 하는 일이 부담으로 느껴졌다. 

 어떤 단 한사람과도 눈을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시간은 더디 흘렀다. 자동차 열쇠를 ACC(accessory,시동 전 단계)에 두고 라디오를 켰다.   허스키한 음성의 여성 사회자가 간간이 노래에 대한 설명을 덧붙일 뿐 음악이 주를 이루었다. 차 시동을 켜면 늘 클래식 아니면 팝송이 흘러나왔다. 연희가 채널을 고정해 놓은 듯했다. 이해하지 못할 노래 몇 곡이 흘러갔다. 배고픔이 고통으로 느껴진다.


  엊그제 연희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며 아이스박스 가득 먹을 것을 챙기던 모습이 번개처럼 스쳤다. 급히 차에서 내려 트렁크로 갔다. 아이스박스는 그대로 모셔져 있었다. 박스 안에 물이 반쯤 남아있는 큰 생수병, 막대사탕, 쓰레기로 보이는 검정색 비닐봉지가 들어있었다.      

 당이 떨어져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 같은 환자처럼 허겁지겁 사탕 봉지를 뜯어 입에 넣고는 검정비닐 봉지를 풀었다. 

 “오오 주여, 나무관세음보살!”

 연희의 시그니처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신에게 감사하는 멘트가 튀어나왔다. 아내는 아이들이 과자를 먹다 남기면 위생 봉지에 담고 그것을 한 번 더 포장하는 습관이 있었다. 공기 차단을 위해 이중으로 포장하고 그녀 특유의 매듭으로 묶어놓는 버릇이다. 

 아이들이 먹다 만 과자들이 그녀의 매듭 속에 수북이 들어있는 게 아닌가.


 천천히 음미하려고 했던 사탕을 아작아작 깨물며 물과 과자를 들고 차안으로 돌아왔다. 사탕의 단물이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기도 전에 과자를 한 움큼씩 집어 입으로 퍼 날랐다. 

 “다음 The River Of Dreams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노래는 빌리 조엘이 발표한 곡으로…가사를 보면 뭔가 잃어버린 것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을 인생으로 비유하고…그 흐름의 과정을 삶으로 바라보는… 평생 알 수 없는 목적을 찾아 살아가다보니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졌다고 고백하는 노래…,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어쨌든 꿈을 찾아가는 내용이 아닌가 합니다. 

~~~

In the middle of the night

I go walking in my sleep

From the mountains of faith

To the river so deep

I must be looking for something

Something sacred I lost

But the river is wide

And it`s too hard to cross

~~~~~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현란한 놀림으로 입안의 것들을 고루 섞으며 환희를 느끼게 했던  혀의 움직임이 서서히 줄었다. 그것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던 뱃속 장치 또한 가동을 멈추었다. 입안에서 미처 침과 섞이지 못한 것들을 꾸역꾸역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목이 메어왔다.   

  

 화요일 아침, 연희가 차려준 밥을 먹고 정장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어제처럼 동네를 배회할 필요도 없어 그나마 마음이 가벼웠다. 노트북, 사무용 수첩, 필기도구 등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천천히 동네를 빠져나오며 아침 일찍 문을 연 김밥집이나 빵집 등이 있는지 살폈다. 어제 학습한 결과였다.

 이른 아침 미사리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 누군가 콧속으로 산소를 주입시키는 것처럼 숨 쉬는 것이 달게 느껴졌다. 정확히 어제 그 자리, 차 바퀴자국까지 맞춰 주차를 했다. 

 오는 길 빵집에서 산 커피를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가졌다.


 어젯밤 그가 며칠 전까지 근무했던 회사 전무가 전화를 걸어왔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만 굳이 전무의 전화만 받은 이유는 평소 현우가 존경하고 신뢰하던 상사였기 때문이다. 

-이부장, 이게 웬일이야? 어제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어, 누가 이부장을 내보냈냐고,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꽁무니를 빼더만, 연구실이 그 지경으로 돌아가는 동안 임원들은 뭘 했는지, 나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네…. 회장님껜 아직 보고도 안 됐더라고, 기다려 봐요 내가 다시 부를 테니…이 패거리들 가만두면 안 돼…내가 회장님 만나 다 불어버리려고.

-흐흐흐흐 전무님, 괜한 풍파 일으키지 마십시오. 전무님에게도 불똥 튈 수 있습니다. 능력이 안 되니 밀려났겠죠.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 하기사 만정 떨어져 두 번 다시 여기 오고 싶겠어, 이놈의 회사 나도 환멸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자네는 뭘 해도 성공할 거야,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한 유일한 천재거든….


 전무는 회사에서 현우를 만날 때마다 오른 손으로 엄지 척을 해 보이며 그를 치켜세웠던, 그의 능력을 익히 알아주던 사람이었다. 경쟁사 연구실에 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놔 줄까 물었지만 현우 마음은 이미 정리된 상태였다. 


 ‘이제 다시는 남 밑에 들어가지 말자! 다른 직장에 취직한들 얼마나 일할 수 있을라고, 내가 주인이 아닌 이상 언제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원한다고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닌… 밥상주인이 아니면… 인간 수명이 점점 길어진다. 추세를 감안하면 아마 칠팔십, 구십까지 일을 해야 할지도, 지금이 절호의 기회일 수도….’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 잠자리에 누워 오늘 할 일을 대충 머릿속에 그려두었었다. 지금까지 써 온 논문들을 훑어보고 그 중 사업 쪽으로 승산이 있을 만한 것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논문들은 대부분 의공학 쪽이었다. 획기적인 의료기기 등을 개발할 내용은 없는지 영어로 된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어나갔다. 


 노트북에서 살 길을 찾느라 뒷좌석 의자에 미동도 않고 앉아있었다. 마우스 까딱거리는 소라와 중간 중간 메모 하는 손놀림이 내 동작의 전부였다. 박사논문과 SCI, 그 외, 학술지에 실린 논문, 카이스트 석사 논문까지 다 훑었다.      


 현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준비한 빵과 우유로 식사를 대신했다. 빵가루 부스러기까지 봉지째 입으로 탈탈 털어 넣고는 500m우유 두 통도 한 방울 남김없이 다 해치웠다. 어떤 일 앞에서도 그는 식욕을 잃은 적 없다. 가끔 자신의 왕성한 식욕이 남들 앞에 부끄럽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으나, 타고난 식성을 어떡하겠는가. 그것만은 스스로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포만감을 안고 차에서 나왔다. 강변을 한 바퀴 걸을 작정이었다. 

 몇 걸음 떼다 다시 차로 돌아가 수첩을 챙겨들었다. 오전 내내 요약해 둔 것을 보며 사업 구상을 할 생각이었다. 박사과정에서 생체공학을 전공해 의료기 관련 쪽이 경쟁력이 있을 것 같았다. 

-척추에 사용되는 인조 고관절, 척추디스크 또는 티타늄 스크류, 특수의자, 무릎 보호대, 목 관련 장비….

 둘레길 반환점을 막 돌 때였다. 자신의 논문 중 독자적인 특허기술로 발전시킬만한 획기적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길과 면한 잔디밭에 앉아, 대략적인 설계도를 그리고 필요한 부분에선 상세도까지 그렸다.      

 빠른 놀림으로 움직이던 펜이 어느 지점에서 멈칫했다. 임상실험 관련 부분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의공학은 임상결과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예측이 의미 없고 특허출원까지 산 넘어 산이었다. 반드시 병원과 의사를 끼고 해야 했던 까닭이다. 

 “아! 내가 왜 그때 일을 생각 못하고….”

 온 몸에 기운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이전 04화 재벌이 되기까지-제 3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