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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리 Oct 21. 2023

디자이너_진짜진짜최종.ai

디자이너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스무 살에 처음 입사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둘 때에도, 나는 이제 디자인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디자인을 그만두면 배워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는데, 바로 커피였다. 평소에도 커피에 관심이 많았고, 카페에 가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때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커피전문점에서 일을 배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카페에서 일을 하면서도 디자인을 내려놓지는 못했다. 습관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디자인들을 유심히 보며 관찰했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두었다. 디자이너로 살아왔던 짧은 시간 동안, 디자인은 이미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파트타임 말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라는 어른들의 계속되는 관심에 못 이겨, 결국 나는 디자인 회사로 다시 돌아갔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디자인 회사를 만났다.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아 일러스트를 켰을 때, 나는 마치 처음처럼 설렘을 느꼈다. 다시 돌아와 보니 디자이너도 꽤 괜찮은 직업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전과는 다르게,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도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회사는 오후 5시면 모두 퇴근을 했다. 나는 디자이너로 일을 하면서도, 정시에 퇴근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었다. 그 삶은 꽤 행복했지만 아쉽게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 회사의 전반적인 업무를 모두 담당했던 상사가 갑자기 퇴사를 했고, 다른 상사가 나를 불렀다.


"그 사람이 인수인계를 해주지 않고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우리도 혼란이 큰데, 힘들겠지만 이 시기를 우리와 함께 견뎌줄 수 있겠어요?"


나는 '제가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부족하지만, 함께 하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또다시 바쁘고 피곤한 삶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남아서 밀린 업무를 하고, 부족한 부분을 각자 공부하고, 많은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덕분에 정말 많이 배웠고 성장했지만, 나는 곧 지쳐갔다. 자꾸만 숨이 막히고, 여기저기 몸이 아프고, 몇 번이나 쓰러졌다. 그만두고 쉬고 싶었지만 회사가 걱정되기도 했고, 회사에서도 나를 계속 붙잡아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아침에는 졸면서 출근을 하고, 저녁에는 울면서 퇴근을 했다. 잠드는 순간에도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밀려와 심장이 쿵쾅거렸고, 주말에도 이 마음은 쉬지를 못했다. 언젠가부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내가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 거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제는 내가 회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을 하면 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를 지켜보며 안쓰러워하던 언니는 어느 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다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번아웃이라는 것이 있대. 이거 너 아니야?"


자세히 들어보니 정말 내 얘기였다. 번아웃에 대해 더 찾아봤는데, 온통 내 얘기였고 공감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그렇게 나는 내가 번아웃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법은 쉬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나와 정말 많이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는 서로를 확신하며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계기로 나는 드디어 회사를 그만두고, 몇 달 후 현실을 떠나 멀리 제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이번에는 늘 해보고 싶었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귤 외에도 다양한 과일과 농산물을 판매하는 마을기업인데, 이곳에서 디자인이 필요한 모든 업무를 맡게 되었다. 제주의 시골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삶, 이거야말로 내가 꿈꾸던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삶도 오래가지 못했다. 몇 달 쉬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번아웃이 금세 찾아왔고, 나는 또다시 디자인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재택근무나 주 4일 근무로 배려를 해주었음에도 쉽게 나아지지가 않았다. 이쯤이면 내가 정말 디자인이랑 안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은 분명 즐겁지만 나는 너무 쉽게 지쳐갔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어졌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가족들에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미안하고 괴로웠다.


나는 또다시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여기저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이제는 누군가 손으로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숨이 막혀오는 순간들도 많아졌다. 나는 자꾸만 목도리를 칭칭 감은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고, 손으로 계속 목에 걸쳐진 것 같은 무언가를 찾아 헤맸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가 않았다. 알 수 없는 원인들로 빨갛게 부어오르거나 수포가 생기는 등 여기저기 작은 병이 생겼고, 병원과 한의원을 오가며 침을 맞고 작은 시술도 하게 됐다. 나는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또 퇴사를 했다. 나는 왜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을 오래 다니지 못할까 자책하며 괴로웠다.


그리고 '쉬면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작은 일들을 하나씩 하는 것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주변에서 들어오는 디자인 의뢰들을 하나씩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브랜딩 디자인 회사를 작게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온라인으로만 연락을 주고받을 생각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일을 하면서 다른 좋아하는 취미 생활도 할 수 있으니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주의 조용한 곳에 작은 작업실을 하나 구했다. 남편과 함께 그 공간을 열심히 꾸미면서 우리 회사의 이름과 방향을 하루종일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대로 가면 디자인 회사에 취직한 것과 뭐가 다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디자인이 싫다고, 디자이너를 그만두겠다고 말했는데도 하마터면 또 디자이너가 될 뻔했던 것이다. 예쁘게 꾸며진 그 공간에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며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그러던 중 브랜드 디자이너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우연히 보고, 또 덜컥 입사 지원을 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면접에서 떨어지는 경험과 함께 상처만 남았다. 나는 왜 자꾸만 디자이너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하고 싶은 것은 많았고, 뛰어나게 잘하는 것은 없었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일 뿐이었고,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디자이너라고 불렸다.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아도 디자인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꿈을 향한 발걸음이 무거워지거나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습관처럼 안전하고 쉬운 길로, 내가 그나마 자신 있는 디자이너라는 현실로 돌아가려 했다. 입사를 하면 꿈과 멀어지니 퇴사를 하고 싶어 졌고, 퇴사를 하니 두려워서 또 입사 지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디자이너와 작가 그 사이에 끼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디자인을 하면 나의 색깔이 너무 뚜렷했고,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디자인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결국 공식적인 디자이너 은퇴 선언을 하기로 결심했다. 디자이너라는 현실을 먼저 내려놓아야만 꿈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고 가끔 디자인 의뢰를 받았을 때에도, 그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나의 선택을 후회하고 반성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프리랜서 디자이너까지 경험을 하고 나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디자인은 즐거웠지만, 나에게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이제 정말로 디자이너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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