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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 특이한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서른일곱이 되어서였다.
이십대 중반 이후로 줄곧 대형 커피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해오던 재현은 서른세 살 때부터 바리스타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오고갔다. 자격증을 딴 후 취업하거나 창업하려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뭔가 달라 보였다. 눈앞을 바라보고 있어도 항상 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서른둘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꿈을 가득 품고 살아가는 소녀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볼 때마다 재현은 크리스 디 버그의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라는 노래가 머릿속을 맴돌았고, 매혹되었고, 그리하여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데이트를 신청했다.
“악한 마음을 순화시키고, 불안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만드는 그런 커피를 만들 거예요.” 어떤 이유로 바리스타 학원에 오게 되었냐는 재현의 물음에 그녀가 대답했다. ‘만들고 싶어요’가 아니라 ‘만들 거예요’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세상엔 악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불안에 떨며 사는 사람들도 너무 많고요.” “그런 커피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위대한 발명품치고 쉽게 이루어진 게 어디 있겠어요. 잘 아시잖아요.” 동조를 구하듯 그녀가 재현을 바라보았고, 재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핸드폰도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잘 아시면서…….” “그거야 그렇지요만…… 순지 씨가 말하는 그런 커피는……” 그러나 재현은 속엣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순수하고 고운 소녀의 꿈을 무참히 짓밟고 싶지 않았다.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가 빨대로 헤이즐넛을 쪼옥 빨아들인 후 말했다. “꿈이 이루어지면 돈을 엄청 벌겠는데요.” 재현은 카페모카를 한 모금 들이켜고 말했다. “그때가 되면 재현 쌤에게도 한 자리 줄 게요.”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신문사나 방송국에 들어갈 생각을 하다가, 남의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일을 하기 싫어서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그러곤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자신이 합격하면 자신보다 열악한 처지에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주며 살 수 있을까 1년 가까이 고민하다가 큰 뜻을 품게 되었고, 그 뜻을 펼치기 위해서 우선은 커피 만드는 기본을 알아야겠기에 바리스타 학원에 등록했다는 것이었다.
재현의 시점으로 정리해 보았을 때 그녀는, 신문사나 방송국 시험에 연거푸 낙방했고 공무원 시험에서도 낙방했고, 그러다가 커피숍 알바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원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재현은 그녀의 시점에 동조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자신의 시점을 바탕으로 한 추측성 발언은 차단했다. 언제까지나 재현은 그녀를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여자가 아닌, 꿈꾸는 소녀로서의 이미지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녀는 바리스타 2급 자격시험에서 떨어졌다. 그녀에 의하면 심사위원이 악한 마음을 지니고서 자신을 계속 노려보는 바람에 불안감이 커져서 카푸치노를 정해진 시간 안에 만들지 못했고, 심사위원에게 제출하면서 그만 엎지르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커피전문점에서 테이크아웃해온 커피에 이것저것 집어넣으며 실험에 들어갔다. 처음엔 꽃잎으로 시작했다. 장미, 아카시아, 찔레, 백일홍, 개망초, 수국……. 거리를 걷다가 꽃만 보였다 하면 꽃잎을 따 가지고 와서 커피에 집어넣고선 음미했다. 그러곤 자신의 불안감이 누그러지는지를 평가했는데, 매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꽃은 아닌 것 같아.”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꽃잎, 그리고 나뭇잎까지는 괜찮았다. 이후로는 사태가 심각해졌다. 토끼 똥을 집어넣기도 했고, 고양이 오줌을 집어넣기도 했다. 도대체 저런 걸 어디서 어떻게 구해왔을까 의문이 드는 것들을 가지고 실험을 해댔다. 재현은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언제까지나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말로도 실험을 중단시킬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고, 그녀의 원룸으로 향하던 발길을 끊었다.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위대한 발명품을 만드는 데 몰두하느라 변변찮은 남자와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안중에 없는 듯했다.
3개월 뒤쯤 재현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 그녀가 사는 동네에 가보았다. 그녀는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꽃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뭐라고? ……응,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어. 어우, 진짜…….” 자동차 안에서 창문을 열고 멀찌감치 지켜보던 재현에게 들려온 말들이었다. 일방적인 말이 아닌, 명백한 대화였다. 재현은 그녀와 다시 사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평소에도 저 먼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관계를 가질 때면 더욱 까마득히 먼 곳을 맴돌았고, 그러면서 까무러치듯 괴성을 연발했고, 재현은 그때마다 뭐라 규정지을 수 없는 신비의 세계로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야릇한 쾌감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그러나 그녀와 다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꽃의 언어를 들을 수 있고 꽃과의 대화가 가능해야 될 것이었다. 재현은 서글픈 마음을 안은 채 그녀에게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