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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Jan 31. 2022

밤의 감정

  지난밤에 마신 술 때문에 S는 머리가 아프다. 속도 좋지 않다. 후회막심이다. 간단히 1차만 마시고 끝냈어야 했다. 그러나 술 마시자고 한 사람이 2차를 가자고 했고, S는 마지못해하며 2차를 함께 했다. 매번 반복되는 일이다. 상대방을 탓할 수도 없다. 마시기 전에는 1차만 마셔야지, 주량을 넘기지 말아야지 생각하지만, 일단 술이 들어가고 나면 이성의 작동이 흐릿해진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 좋은 상태를 언제까지나 지속시키고 싶어진다. 마실 때는 좋지만, 다음 날이 되면 하루를 망치게 된다.


  S는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설사다. 거울 속의 얼굴은 부스스하고, 술 냄새가 여전히 몸에서 풍겨 나온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햇빛이 환한 날이면 더욱 부끄러움이 일렁인다. 점심을 먹고 나서 조금 지나면 안개가 걷히듯 술기운이 몸에서 서서히 빠져나가고 다시 맑은 기운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S는 다짐한다. 오늘부터는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리라. 꼭 필요한 만남이 아니면 핑계를 대서라도 술자리를 피하리라. 꼭 필요한 만남일 경우에도 절대로 주량 이상은 마시지 않으리라. 다음 날을 생각해서 절제하며 마시리라. 꼭 그래야 한다. 이렇게 사는 건 인생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짓에 불과하다. 그래, 오늘부터는 하루하루 온전한 상태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거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해가 지고 나서 어둠에 몸을 내맡기고 있노라면 외로움이 몰려온다. 책을 읽거나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고 있어도 마음 한 편에서는 술이 자리하고 있다. 휴대폰으로 시선이 간다.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으면 싶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가 될 수 있으니까. 자신이 먼저 연락하게 되면 변명거리가 있을 수 없으니 내키지 않는다.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이제 남은 문제는, 혼자 마실 것인가 그냥 잘 것인가이다. 당연히 그냥 자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냥 잠자리에 들면 잠이 오지 않는다. 한두 시간을 뒤척이다가 잠이 든다.

  S가 혼자서 술을 마시게 된 계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드러누우면 곧바로 잠이 드는 사람이 부러울 정도로 S는 이 생각 저 생각 속을 떠돌다가 잠이 드는 체질이다. 어떤 때는 뒤척이고 또 뒤척이다가 날이 밝는 걸 목격하는 지경에 이른 적도 있었다. 그때의 처참한 기분이란…….

  술을 마시면 바로 잠에 빠져든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S는 혼자서 술을 마시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는 길임을 S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통증이 심할 때 견딜 수 없어 진통제를 안 먹고는 못 배기는 것처럼 그렇게 습관이 들고 말았다. 꾹 참고 그냥 잠자리에 들면 잠시 뒤척이는 게 괴롭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몸도 가볍고 기분도 상쾌하다. 틱 틱 틱 틱……. 갈등 상황 속에서 S는 변함없이 흘러가는 초침 소리를 듣는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상호작용하여 그리스 비극이라는 장엄한 예술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며 이성을 상징하고 절제와 균형을 중시한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며 어둠 속에서 솟아나오는 감각적 쾌락과 창조성을 추구한다. 아폴론만 있다면 너무 무미건조하고 디오니소스만 있다면 광기로 흐를 위험이 다분하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적절한 견제와 조화 속에서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주역』에서도 음과 양의 대립과 화합 속에서 만물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말하고 있다.


  빛과 어둠 속에서, 빛과 어둠의 속성에 영향을 받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으리라. 밤에는 아무래도 감성적이 된다. 밤에 쏟아낸 말이나 글을 낮에 떠올리며 낯부끄러웠던 경험이 한 번씩은 있으리라. 같은 낮이더라도 날씨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화창한 날에 비해서 마음이 움츠러들고 스산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빛이 많은 여름과 빛이 적은 겨울에 몸 상태나 활동량, 그리고 마음 상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둠이 싫다고 해서 빛 속에서만 살 수 없고, 빛이 싫다고 하여 어둠 속에서만 지낼 수도 없다. 어둠과 빛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기쁨과 슬픔의 감정은 물론이고, 생명 자체의 존립 기반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이어가던 S는 어둠과 빛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선물 같은 것인지,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기적 같은 현상인지 새삼 깨닫는다. 하루하루, 일분일초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가슴속을 가득 채운다.


  틱 틱 틱 틱……. 깊은 밤의 정적 속에서 초침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온다. 그리고 S는 여전히 갈등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래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럴까 저럴까 갈등할 수 있다는 것조차도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를 가슴속에 새기며.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 그냥 자자. 술 마시고 다음 날 후회하느니 좀 뒤척일지라도 다음 날 맑은 정신으로 생활하는 게 낫겠다. S는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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