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죄명: 거짓을 빌려 분쟁을 일으킨 죄
[악마 소개]
엘리고스.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기병의 모습으로 나타나 창을 들고 말을 몰며 전장을 누빈다.
그의 능력은 ‘거짓된 전쟁의 선동’이다. 그는 작은 갈등에 기름을 부어 싸움으로 키우고, 기만으로 사람들을 움직여 서로에게 창을 겨누게 한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허위의 깃발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지만, 사람들을 광기에 빠뜨리기에 충분하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진실의 창기병 창이다. 그것은 그의 거짓 깃발을 찢고, 전장의 허상을 무너뜨린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말하라.
엘리고스: 나는 엘리게오스.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본능 아닌가. 나는 그 본능을 이끌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나의 뒤를 따르며 힘을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투쟁의 의미를 주었다.
철학자: 네 죄명은 허위의 전쟁과 기만이다. 너는 진실이 아니라 거짓으로 사람들을 움직였다. 네가 준 것은 의미가 아니라 파멸이었다.
엘리고스: (비웃으며) 그러나 사람들은 원했다. 그들은 싸우고 싶어 했다. 나는 단지 그들을 모아 깃발을 들었을 뿐이다. 그 깃발이 거짓이라도, 힘은 진짜였다.
철학자: 아니다. 거짓은 힘이 아니라 독이다. 네가 든 깃발은 사람들의 눈을 가렸고, 그들의 손에 피를 묻혔다. 진실을 속인 순간, 네 힘은 이미 죄였다.
엘리고스: 전쟁 없는 세상은 없다. 나는 불가피한 일을 했을 뿐이다.
철학자: 불가피한 전쟁이 아니라, 네가 만든 허위의 전쟁이었다. 네 기만이 불러낸 피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엘리고스는 철학자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
느리게 웃었다.
전장을 수백 번 헤집고 다닌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피 냄새가 섞인 오만한 미소였다.
엘리고스:
“대장부? 비겁함?
너는 전장을 모른다, 철학자.
진실이 얼마나 허약한지, 전쟁터에서는 금세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진실보다 더 강한 불을 원한다.
나는 그 불을 준 것이다.”
철학자:
“너는 진실을 두려워해 거짓을 휘둘렀다.
그것이 네 약함이다.”
엘리고스:
“약함?”
그의 창끝에서 검붉은 형상이 일렁였다.
“전쟁을 움직인 건 언제나 진실이 아닌 깃발이었다.
그 깃발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따라오면 그것이 힘이다.
너는 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구도자일 뿐이다.”
철학자:
“허위로 만든 힘은 힘이 아니다.”
엘리고스:
“힘이냐, 기만이냐를 따지는 자는 전장에서 먼저 죽는다.”
그는 말의 발굽으로 법정 바닥을 울렸다.
“나는 진실을 무기로 삼지 않았다.
승리를 무기 삼았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힘의 기준이다.”
철학자:
“네 말은 결국, 목적을 위해 수단을 왜곡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엘리고스는 그 말에 오히려 피식 웃었다.
엘리고스:
“나는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
죄라면? 그래, 나는 죄를 짓는다.
하지만 인간들은
너희 인간들은, 그 죄를 바라며 나를 불렀다.
거짓이라도 좋다고 외치며 내 깃발 뒤에 섰다.
네가 나를 심문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네가 인간의 본심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지.”
철학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엘리고스는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법정까지 전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자였다.
엘리고스:
“나는 패배하러 온 게 아니다, 철학자.
나는 여기서도 깃발을 든다.
너는 단지 그 깃발의 의미를 부정하고 싶어 할 뿐이지.
그러나부정이 힘을 꺾을 수는 없다.”
법정의 공기가 팽팽히 당겨졌다.
굴복은커녕, 엘리고스는 오히려 더 단단해지고, 더 전쟁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철학자는 눈빛만 좁혀 말했다.
철학자:
“…좋다. 오늘은 네 거짓의 무게를 가늠하러 온 것이다.
굴복은 필요 없다.
진실은 네가 굴복하지 않아도 드러난다.”
엘리고스는 턱을 들었다.
패배의 기색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
엘리고스:
“그렇다면 겨뤄라, 철학자.
진실의 창과, 허위의 깃발이
어느 것이 더 오래 서 있는지.”
법정은 더 이상 법정이 아니었다.
두 세계의 진실과 허위가 대치하는 전장 한가운데가 되어 있었다.
[심판]
철학자는 진실의 창기병 창을 들고 엘리게오스의 가슴을 겨눴다.
철학자: 엘리고스, 이 창은 네가 휘두른 거짓의 깃발을 찢을 것이다. 진실은 전쟁의 구실이 될 수 없다.
철학자의 창끝이 가슴을 겨누자,
엘리고스의 얼굴에서 오만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여전히 큰소리를 치려 했지만,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장을 지배하던 기병의 기세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거짓 깃발 뒤에 숨던 비겁한 본색이었다.
철학자(아르칸테):
“네 깃발은 허위였고,
네 용기는 환상이었다.
진실의 앞에서는
네가 만든 전장은 모래성일 뿐이다.”
엘리고스는 말을 몰아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미 진실의 빛 앞에서 뿌리째 힘을 잃고,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엘리고스:
“그… 그 깃발은… 사람들을 움직였”
철학자:
“입 다물어라.
사람들을 ‘속인 힘’을
너는 평생 ‘전장의 힘’으로 착각했지.”
철학자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 한 걸음만으로도,
악마의 몸은 심문대 위에서 흔들려 주저앉을 듯 떨렸다.
철학자:
“네 전쟁은 진실이 만든 것이 아니다.
네 두려움이 만든 것이다.
겁쟁이가 흔든 깃발은
이제 여기서 끝이다.”
그가 진실의 창을 높이 들었다.
창날에는 허위의 그림자들이 비명처럼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철학자:
“엘리고스.
너의 전장은 오늘 여기서 무너진다.”
그리고 그 순간—
창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번쩍.
붉은 깃발은 찢어지지도 못한 채,
빛에 닿자 재처럼 부서져 공중에 흩어졌다.
군중의 환영은 비명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엘리고스의 말은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더 이상 숨조차 쉬지 못했다.
악마의 손에 들린 창은
뚝— 하고 부러져
먼지 한 줌으로 남았다.
엘리고스는 뒷걸음질치다가
진실의 광휘에 등을 데이며
비겁하게 비명을 질렀다.
엘리고스:
“그만!
그 진실의 빛… 멈춰라!
나는 나는 싸우려 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는 냉정하게 마지막 말을 내렸다.
철학자:
“그래.
네 죄는 ‘싸운 것’이 아니다.
‘속인 것’이다.”
빛이 폭발하듯 퍼지며
엘리고스의 형체를 삼켰다.
그 비명은 길지 않았다.
허위는 진실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남은 것은
거짓의 파편 한 톨 없는,
맑고 냉정한 법정의 바닥뿐이었다.
[귀환]
거짓의 전장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무기 없는 한 인간이었다.
그는 땅에 엎드려 낮게 말했다.
"나는 거짓 깃발을 흔들며 전쟁을 부른 죄인이다. 이제는 진실을 속이지 않고, 피의 구실을 만들지 않겠다."
[교훈 ]
거짓은 힘이 아니라 독이다. 허위의 깃발은 순간 사람을 모으지만,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