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죄명: 절제를 버리고 혼란 속에 방탕을 즐긴 죄
[악마 소개]
레라지에.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용의 머리를 한 전사로, 전쟁과 파괴의 혼란 속에서 나타난다고 전해진다.
그의 능력은 ‘방탕의 해방’이다. 그는 인간에게 절제를 잊게 만들고, 충동과 쾌락에 몸을 맡기게 하여 질서를 무너뜨린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법과 규율이 끊어진 순간, 혼란 속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절제의 그물이다. 그것은 충동을 붙잡아 방탕의 자유를 가짜임을 드러낸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밝혀라.
레라지에: 나는 레라지에. 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억압된 규칙을 부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즐기게 했다. 나는 삶을 풍요롭게 했다.
철학자: 네 죄명은 혼란과 방탕이다. 네가 부순 것은 억압이 아니라 질서였다. 네가 준 자유는 해방이 아니라 방종이었다.
레라지에: (비웃으며) 질서라니, 그건 족쇄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마음껏 즐길 때 진짜 살아있다. 나는 그들을 살게 했다.
철학자: 아니다. 너의 자유는 곧 파괴였다. 절제를 잃은 쾌락은 곧 고통을 낳고, 혼란은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너는 삶을 풍요롭게 한 것이 아니라, 허물어뜨렸다.
레라지에: 인간은 어차피 충동적이다. 나는 그들의 본성을 해방시켰을 뿐이다.
철학자: 충동은 본성이지만, 절제는 인간다움이다. 절제가 없는 자유는 방탕이고, 방탕은 존재를 무너뜨리는 독이다.
레라지에:
“네가 말하는 절제…
그건 인간이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만든 가짜 덕목이다.
본능이 부르는 곳으로 향하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나는 인간의 자연을 되찾아줬을 뿐이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
인간의 숨막힌 속박을 깨뜨린 ‘해방자’라는 확신이 서 있었다.
레라지에:
“인간은 억눌릴 때 병든다.
나는 그 병을 터뜨려 줬다.
그들이 술에 취해 흔들리던 밤에도,
욕망을 따라 방황하던 순간에도,
그들은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건 혼란이 아니라 생명력이다.”
철학자:
“생명력이라 부르지만,
네가 만들었던 것은 통제 잃은 불길의 춤이었다.
불꽃은 아름답지만,
제어되지 않으면 모든 것을 태운다.”
레라지에:
“그래, 태웠지.
그게 뭐가 문제인가?
태우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생기지 않는다.
나는 파괴를 했지만,
그 파괴는 억압을 찢고,
그들에게 숨을 틔워줬다.”
철학자:
“파괴가 낳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잿더미였다.”
레라지에:
“잿더미 위에서는 뭐든 다시 지을 수 있다.
절제와 규범, 도덕 따위에 갇혀
평생 같은 형태로만 살아가는 것이
정말 인간답다고 생각하나?”
그는 마치 자신이 전쟁의 사령관이라도 되는 양
당연하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레라지에:
“인간은 감정에 취할 때, 욕망에 흔들릴 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마주한다.
나는 그들의 가면을 벗겼다.
그것이 죄라면
나는 기꺼이 그 죄를 다시 지을 것이다.”
철학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분노도, 당황도 아니었다.
명확한 판단을 하기 직전의 정적이었다.
철학자:
“레라지에, 너는 혼란을 생명으로 착각했다.
방탕을 생동으로 오해했다.
그리고 파괴를 자유라 포장했다.
너의 모든 말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철학자가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철학자:
“너는 오만한 자다.
자신의 충동을
‘필연’이라 부르고,
자신의 파괴를
‘자연’이라 부른다.”
레라지에의 미소가 서서히 굳었다.
철학자:
“이제, 네 오만을 벗겨낼 때다.”
[심판]
철학자는 절제의 그물을 펼쳐 레라이에 위로 던졌다.
그물은 단단히 얽혀 그의 몸을 감쌌다.
철학자: 레라지에, 이 그물은 네가 버린 절제다. 충동을 붙잡는 순간, 네가 자랑하던 자유가 가짜였음이 드러난다.
레라지에는 몸부림쳤으나, 그물이 조여올수록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던 불꽃 같은 쾌락의 환상이 끊어졌다.
그가 외치던 환호는 비명으로 바뀌었고, 그의 눈빛은 흐려졌다.
마침내 그물은 그를 땅에 내리꽂으며 죄를 묶었다.
레라지에는 땅에 내리꽂히는 순간,
숨이 턱 막히며 먼지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몸을 비틀었다.
절제의 그물이 그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불꽃처럼 일어났던 쾌락의 광휘가
차갑게 꺼져 가는 것을 느끼자,
분노와 억울함이 동시에 치밀었다.
레라지에:
“이건… 속박이다!
이건 자유를 죽이는 형벌이다!
내가 한 일은 해방이었다!
왜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족쇄에
내가 묶여야 하는가!”
그물은 그의 손목을 끌어당기고,
발목을 조이고,
마치 오래전 잊혀진 규율이
그의 뼛속까지 다시 스며드는 듯한 고통을 줬다.
레라지에:
“놔라!
나는 그들에게 삶을 줬다!
숨을 주고, 열정을 주고,
그들이 잊었던 욕망을 깨웠다고!”
그의 외침은
마치 사라져가는 전쟁의 함성처럼 떨렸지만,
철학자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철학자:
“아니다, 레라지에.
네가 준 것은 삶이 아니라 도취,
불꽃이 아니라 중독,
자유가 아니라 붕괴였다.”
레라지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언제나 ‘본성의 해방자’라고 믿어왔던 명분이
철학자의 말 앞에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레라지에:
“나는…
나는 인간을 이해한 자다!
그들의 숨겨진 갈망을…
그들의 목마름을…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
그게 왜 죄가 되는가!?”
철학자:
“그들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네가 이해한 것은 그들의 틈이다.
그 틈을 넓혀 혼란을 만들고,
그 혼란을 자유라 속여
너 스스로 취한 것뿐이다.”
그물은 또 한 번 조여 들었다.
레라지에는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 속에는 분명한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그의 존재는 더욱 강하게 흔들렸다.
레라지에:
“나는 억울하다…!
왜 내 길만 죄가 되는가!
왜 인간의 충동을 인정하지 않는가!
절제가 그렇게나 고귀하다면,
왜 인간은 매번 나를 찾았던가!
왜!”
철학자:
“그래서 너의 죄가 더욱 무겁다.
인간의 약점을 알고도,
그 약점을 키운 것이 너이기 때문이다.”
레라지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억울함, 분노, 공포
모든 감정이 뒤엉킨 채
절제의 그물 속에서 떨리며 흔들렸다.
철학자:
“이제 네가 도망친 감각을,
너 스스로 견뎌라.”
그리고 그물은 완전히 잠겼다.
레라지에의 쾌락의 빛은 꺼지고,
그의 억울한 울음만이
텅 빈 법정에 메아리처럼 남아 흔들렸다.
[귀환]
방탕의 환영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는 절제의 그물에 묶인 채 고개를 떨구며 속삭였다.
"나는 혼란과 방탕에 빠져 산 죄인이다. 이제는 절제를 배워 인간의 길을 걷겠다."
[교훈 요약]
절제 없는 자유는 방탕이고,
방탕은 존재를 무너뜨린다.
진짜 자유는 절제 속에서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