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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l 07. 2018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운명적으로 한번 태어나 단 하나의 삶을 사는 우리의 존재는 숭고해 마땅하다. 숭고한 이유를 달리 어렵게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삶을 소유하고 지속한다는 그 자체로서 숭고할 뿐이다. 낭만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운명적'이라 할 것이다. 


하물며 이러한 인간의 삶을 그린 문학 역시도 숭고한 인물의 숭고한 정신이 담기기 마련이다. 단 하나의 삶은 언제나 숭고하게 여겨진다. 현실이든 문학 안에서든,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불씨가 언제 어떻게 꺼지든지 간에 말이다. 물론 "만약 그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가정은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미 삶은 선택되었고, 앞으로 선택할 사건과 시간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한 단 하나의 최선의 순간들만이 우리 인생에서 유효할 뿐이다. 예니 에르펜베크의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이렇게 하나로서 숭고해 마땅한 누군가의 '저무는 순간'(즉 죽는 순간)을 여러 번의 가설을 통해서 다시 세우고 이야기를 지속한다. '만약'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사건들을 삶의 여러 고비들 마다 배치하여 한 가족과 역사의 흐름을 여러 갈래로 쪼개어 펼쳐보는 소설이다. 


다만 특이한 점은 이러한 '펼쳐짐'의 순간에 일어날 수도, 혹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여러 사건과 역사들이 단지 '상상'으로만 묘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삶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더라도, 죽지 않고 사는 나에게 지금 이렇게 한 뼘 더 연장된 이 순간이 과연 필요한지, 그렇다면 무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된다. 삶이 계속된다는 것은 단지 '축복'이라고 선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어떤 이유로, 어떤 이념으로, 어떤 사명감으로) 살고 있는지, 하루라는 시간이 더 주어졌다고 해서 그 답을 찾는 게 좀 더 쉬워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의 주인공은 모계로 이어지는 어떤 '여자들'이다.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 갓난 여자아이는 막간극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고, 유럽 전체를 관통하는 쉼 없는 전쟁 속에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한다. 처녀로 자라나 어쩌다가 짧은 치마를 입은 이 여자 아이는 창녀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러시아 공산주의의 최전방에서 희생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죽지 않을 수 있는 우연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럼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족을 이루고 소생을 낳았을 수도 있다. 거기서 조금 더 삶이 지속되었다면?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어 위대한 글을 써서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을 줄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이런 모든 업적과 함께하는 삶을 연명하다가, 불의의 낙상 사고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는 한 인물이 맞딱뜨릴 수 있는 사건의 길목에 '만약'을 설정해봄으로써 조금 더 이어질 수도 있는, 그러면서 연장될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는 삶의 시간들을 주욱 늘려서 바라본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마땅하다.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저녁은 마땅히 저물 수 밖에는 없다. 하지만 삶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바로 그 '죽음'은, 각자가 최선으로서 살면서 선택한(혹은 선택된) 순간임에는 확실하다. 지금 내가 허투루 살다 죽었더라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어떤 사건들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음의 문턱에 있을 것이다. 매 순간은 언제나 저물고 있지만, 각자의 저무는 순간이 하찮지 않고 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삶과 역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저녁이 저물 때>의 다양한 죽음 이후 달라져간 역사의 순간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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