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영어에 자신감이 붙었을 때 영국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당황스럽게도 영국인이 하는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나를 발견했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스스로 원어민처럼 듣고 말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영국에 오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심을 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듣기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영국에 머물 수 있는 3개월 동안 하루 24시간 영국 영어를 들어보자고. 그렇게 해서 BBC 라디오를 하루 24시간 들었다. 무엇을 하건 내 귀에는 BBC 방송만 들리는 환경을 만들었다. 방 안에 있는 라디오는 BBC만 나오게 설정을 하고 밥을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갈 때 혹은 외출할 때는 늘 이어폰을 통해 BBC 라디오를 들었다. 잠을 잘 때도 라디오는 끄지 않았다.
사진 출처: bbc.co.uk
처음에는 주문처럼 들리던 영국영어가 어느 날부터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맥락상 "저 상황에서 저런 발음을 하는구나"하는 식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캐주얼한 프로그램의 경우 출연자가 퇴장할 때 '치어스 마이트(Cheers mate)'를 반복하곤 했는데, 내가 편의점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나갈 때 직원도 동일한 발음을 하는 걸 보니 '땡큐(Thank you)'를 대신하는 말이구나라고 파악하는 식이었다.
목표로 했던 3개월이 채 되기 전에 웬만한 영국 영어가 다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뜻을 모두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영국 영어라는 소리에 내 귀가 익숙해졌음을 알게 되었다. 듣기가 어느 정도 축적되었다고 판단이 되어 바로 이어서 말하기-읽기-쓰기 순으로 영국 영어를 익혀 나갔다.
듣기 단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1. 뜻을 알려고 하기보다 음을 알려고 노력해라
많은 사람들이 듣기 공부를 할 때 "아무리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좌절하곤 한다. 이렇게 좌절하는 이유는 '들으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해서다. 그렇다 보니 듣는 내용을 텍스트로 확인하는 즉 듣기와 읽기를 병행하게 되고 이 때문에 듣기 공부가 버거워지는 것이다.
듣기 단계에서는 뜻에 집착하기보다는 음악을 듣듯이 저런 식으로 소리를 내는구나에 집중을 하는 것이 낫다. 이런 마음가짐이라야 오랜 시간(심지어 하루 24시간) 외국어에 나를 노출시킬 수 있다. 팝송을 들을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스트레스 없이 노래를 즐길 수 있듯이 말이다.
2. 모국어를 최대한 듣지 말아야 한다
영국에 가기 전에 캐나다에서 6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래서 총 어학연수 기간은 9개월이었다) 그 당시 스스로 목표한 것이 한국어로 된 '노래' '영화' '드라마' 등의 콘텐츠를 일절 보고 듣지 않는 것이었다. 확실히 큰 효과를 보았다. 캐나다를 떠날 때 오랜만에 듣게 된 한국어가 영어보다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렀던 캐나다 캘거리는 한국인 유학생이 유독 많은 편이었다. 어학연수원에서 배정한 학원에 처음 갔을 때 한 반에 12명 중 11명이 한국인 학생이어서 내가 강남에 있는 YBM에 온 것인지 캐나다 어학원에 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어렵게 캐나다에 온만큼 독한 마음을 먹고 한국인과 대화를 할 때도 늘 영어를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 친구들도 나를 외국인 취급을 하면서 그들끼리는 한국어를 써도 나에게는 영어를 사용했다. 초반에 이런 나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한 친구가 나의 송별회 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송별회에서는 예외적으로한국어를 사용했다)
저는 캐나다에 머문 지 1년 가까이 되었는데, 맨날 한국 드라마 보고 한국 음악을 듣다 보니 아직도 영어가 잘 안 들려요. 저도 형처럼 독하게 영어만 들었어야 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쉽네요
해외 어학연수는 영어 듣기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다. 반면 한국에서 공부하는 경우 24시간 영어 듣기가 불가능할뿐더러 어쩔 수 없이 모국어에 지속적으로 노출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 모든 상황에서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들을 수 있도록 환경 설정을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집에 와서는 영어로 된 콘텐츠만 본다든지 아니면 출퇴근 시 팝송만 듣는다든지 하면서 말이다. 나 또한 지금도 매일 출근길에 중국어를 듣고 있다.
3. 미드보다는 뉴스, 뉴스보다는 오디오북
한때 미드 '프렌즈(Friends)'로 영어 공부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드라마는 그 나라 사람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살아있는 언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외국어 공부에 매우 유용하다. 다만 이는 '고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미국 시트콤 <프렌즈>, 사진 출처: wikipedia
드라마의 경우 원어민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이다 보니 일단 말이 빠르다. 초보자가 듣기에 적당한 속도가 아니다. 게다가 '유행어'나 '속어' '줄임말' 등 알아듣기 힘든 말이 난무하고 배우들의 발음도 캐릭터에 따라 불분명한 경우까지 있어 듣기 공부에 활용하기에 최적의 콘텐츠는 아니다. (한국 드라마도 특정 배우의 발음을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드라마보다는 조금 더 정확한 발음과 표준 어휘를 구사하는 뉴스가 듣기 공부에는 더 나은 매체다. 뉴스의 또 다른 장점은 매일 반복되는 어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뜻을 몰라도 맥락을 파악하기에 더 유리한 점이 있다.
이러한 뉴스보다 더 나은 매체가 있다. 바로 오디오북이다. 오디오북은 말 그대로 청각 매체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최대한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과 속도로 말을 한다. 그리고 후속 편에서 이야기를 하겠지만 '말하기'와 '읽기' 단계에도 큰 도움이 되는 매체이므로 오디오북은 외국어 공부에 있어서 필수적인 매체다. 개인적으로 아마존의 Audible을 잘 이용했는데 '30일 무료' 이벤트와 같이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프로모션도 자주 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쓸 수 있다. (광고가 아닌 내돈내산이다)
사진 출처: Amazon.com
'듣기'는 언어 공부의 시작점이다. 시작점에서 좌절하거나 흥미를 잃으면 이어질 '말하기' '읽기' '쓰기'까지 나아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듣기' 단계에서는 너무 많은 욕심을 내기보다는 일단 꾸준히 영어에 나를 노출시켜 영어와 친해지자라는 목표를 갖고 공부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