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초빈과 나는 정신없이 홀을 가로질렀다. 공중에 걸린 거대한 전광판 위로 하얀 가면을 쓴 소유하 대표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언제 찍었는지도 모를 짧은 광고였다.
부작용이라뇨? 그런 건 없습니다. 감정은 그저 데이터일 뿐이니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고객님께 더 나은 감정 데이터와 신형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감정의 고통에서 벗어나세요. 지금 당장 일주일 무료 체험을 신청하세요.
광고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화면이 마젠타 빛으로 물들었다. 강렬하고도 날카로운 진동음이 건물을 뒤흔들 듯 울렸다.
「긴급 공지: 소유하 대표 복귀.」
순간 우리는 얼어붙었다. 그리고 시선이 닿는 곳, 좌표의 끝인 분리수거장 근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소유하였다.
“대표님?”
평소와는 달리 흰 마스크와 캡모자, 블랙 저지 차림이었다. 조금은 낯선, 또래와 가까워 보이는 모습에 순간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다. 우릴 보자마자 그녀는 손을 펼쳤다. 네일 위로 다채로운 빛이 유영하듯 흘렀다.
“짜잔-. 네일 한다고 그랬잖아요.”
“뭐예요, 갑자기?”
홍초빈은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잔뜩 긴장한 채 날을 세웠다.
“퇴근시간이 훌쩍 넘었네요. 여기서 뭐해요 다들?”
“아, 그게…”
내가 머뭇대자, 소유하는 과장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핫! 회사의 어두운 비밀이라도 파헤치려고 온건 아니죠?”
“그게 아니라.”
“‘선한 얼굴을 한 대표의 이중생활’ 이딴 말할 거면 미리 말해줘요. 각색은 내가 하는 게 나으니까. 그냥 들어도 너무 진부하잖아요~.”
“대표님, 그런 의도는…”
“숨길 생각이었으면, 여긴 안 왔겠죠.”
어느새 내 코앞까지 온 소유하가 다가왔다. 소유하의 눈 한쪽에서 마젠타 빛이 나선을 그리듯 일렁였다. 그 눈빛은 호기심인지 위협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가면서 정구현 씨의 보고부터 받죠?”
“아.”
내가 멍하니 있자, 소유하는 답답하다는 듯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뒤돌아 홍초빈에게 말했다.
“초빈씨는 먼저 퇴근해요.”
홍초빈이 따라오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였지만, 내가 고개를 저으니 그녀는 아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쿵쿵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소유하의 타이밍은 참 악의적이다.
***
소유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구현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하준과 그의 부모가 사는 집 앞에 있었다. 그의 특별한 눈을 통해 실시간 영상이 우리에게 전송됐다. 그리고 정구현이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점검 오셨죠?”
문을 연 건 하준이었다. 어른 키의 반도 안 되는 열두 살 소년. 하준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아버님께 연락받았어.”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아빠는 내일 오고요, 엄마는 한 시간 뒤에 돌아와요.”
정구현은 하준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모던하고 깔끔한 내부가 뜻밖에 음울해 보였다. 곧이어 정구현의 시선이 하준의 손목으로 갔다. 워치는 전보다 더 견고하게 묶여있었다. 정구현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폐기유무는 부모님 만나고 정할까요?
폐기라니. 나는 옆에 있는 소유하를 보았다. 그녀는 그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 소름 끼쳤다. 나는 정구현에게 짧게 ‘네.’라고만 답했다.
정구현은 하준의 목덜미를 살피며 감정 칩을 확인했다. 화면 위로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감정 데이터 불안정.
임시방화벽 손상 감지됨.」
정구현이 도구를 꺼내며 다정히 말을 걸었다.
“오전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들었어. 괜찮니?”
“괜찮아요.”
"화나진 않았어?"
"화 안 났어요. 엄마가 화났죠."
“그래?”
정구현은 하준의 미세하게 흔들리는 어깨를 주의 깊게 보았다. 아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한테 미안하긴 한데... 솔직히 짜증 나요. 매일 나만 감정을 조절해야 하고, 학교에선 나만 이상한 사람처럼 보잖아요.”
하준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어이구, 그렇구나.”
"제가 감정을 드러내면 다들 불편해하잖아요."
아이의 말에 작은 맞장구를 쳐주며 정구현은 소리 없이 날뛰는 감정 수치를 조절했다.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 사이를 틈만큼 열었다.
하준이 돌아봤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아이의 눈에는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역시 그건 회사에서 정식으로 처리되지 않은 감정이었다. 이 감정의 찌꺼기가 대체 어디서 흘러왔는지 알고 싶었다. 2차 보고는 내일 하겠다는 정구현의 메시지를 끝으로 영상은 끝났다.
그 사이 우리는 덤불이 우거진 곳에 도착했다.
나는 가슴속의 죄책감과 불안함을 억누르며 소유하에게 물었다.
“이 소년, 어떻게 하실 거죠?”
소유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 너무 잘 배운 휴머노이드일수록 통제가 어려워지죠. 제가 늘 말하잖아요. 헷갈릴 땐 새 모델로 교체하는 게 정답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앞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덤불에 가려진 검은 곡선형 상자가 있었다. 바람 하나 없는데, 풀잎이 먼저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는 무언가가, 안에서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홀린 듯, 그것이 내뿜는 희미한 회색빛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