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닿지 않을 것들

- 기름값 5만원으로 내가 한 일 -

by 도시백수

강원도 인제에서 고성으로 넘어가는 진부령 고갯마루는 아직 겨울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밤보다 짙은 색의 아스팔트길 옆으로는 여전히 하얀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봄을 당기고 싶은 사람들이 열심히 밀어냈을 터이지만, 이곳에서 겨울은 여전히 현재형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국도변 찻집이 열려 있을 리는 만무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길 지날 때면 항상 들렀기에, 알면서도 차를 세웠다. 가게 안도 짙은 어둠이었다. 출발할 때 사둔 생수를 한 모금 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주차장 한편에 쌓은 겨울의 무더기를 지그시 밟는다. 딱딱했다. 얼어 있는 모양이다.


토요일 밤, 하릴없던 내 마음이 갑작스레 바다로 향했다. 번잡한 고민 없이 차에 올라 두 시간여를 달렸다. 저 아래로 검푸른 바다와 그 가장자리에 면한 육지의 불빛이 아른거린다. 수도 없이 만났지만 여전히 설레는 것은 첫사랑과 닮은 듯도 하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랐듯 이다음에 바다를 보며 살고 싶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차에 오르기 전에 내비게이션을 켰다. 화진포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잘 모른다. 수도 없이 다녔지만, 아직 길을 외지는 못한다. 제법 긴 거리다. 가로등 드문 시골동네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천천히 지났다. 밤눈 밝은 것들이 뛰어들까 걱정이 됐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바다는 여전했다. 앞쪽으로도 너른 백사장 너머로 희끄무레 파도의 끝이 보였다. 저 파도를 만들어내는 데 달도 한몫한다는 사실이 난 신기하다. 그 원리는 진즉 이해하고 있지만, 저 하늘의 둥근 달과 여기 이곳이 연결돼 있다니.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끊기지 않고 엮여 있다는 그 사실이자 진리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따지고 보면 너와 나도 다르지 않을진대 오늘 너에게 상처를 주고 내일은 내가 상처를 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서러워졌다.


차 속에 누워 듣는 파도가 멀어도 끊기지 않으니 무서움을 덜어준다. 바다와 가장 가까이서 잠을 청한다. 밤새도록 저 파도는 내게 닿을 듯 닿지 못할 것이고 꿈속에서 나는 그 누군가를 만날 듯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편이 내겐 어울릴지 모른다. 걱정했지만 잠은 비교적 쉽게 날 찾았고, 시계 알람이 부를 때까지 깨지 않았다.


주섬주섬 일어나 다시 해변으로 나간다. 막 어둠이 물러가는 시간이었다. 빛보다 안개가 먼저 온 탓에 수평선 끝 해가 걸려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힘들다. 화진포의 모래밭은 넓었다. 한참을 걸어 물에 닿았다. 밀려온 파도가 발 밑에서 부드러운 포말로 산화해 간다. 저곳에 맨발을 내밀면 차가움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순식간에 상상해 버린 내 뇌는 곧바로 귀찮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발길을 돌렸다. 화장실에 들르고 다시 차에 올랐다. 아침밥으로는 드디어 진부령 황태마을 해장국을 먹을 생각이다. 진득하니 그 뜨끈한 국물을 어여 마시고 싶다.


오가는 데 기름값 5만 원 정도 든 모양이다. 그리 아깝지는 않다는 게 스스로 이상했다.


점심 무렵 집에 돌아오니 곧 여운이 엄습해 온다. 꿈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여운은 곧 그리움이다. 그리고 그에 이끌리듯 난 다시 떠날 것이다. 봄은 이제 다 온 듯한데 아직 보이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