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리코 파체의 타건은 단아하면서도 강직하고 단호하다. 그는 도입부터 깔끔하고 세련된 사운드로 압도적인 시작을 알린다. 이승원이 이끄는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유려하고 확고한 앙상블로 오늘 연주에 대한 기대를 급상승하게 만든다. 지휘자 이승원은 진취적이고 머뭇거림 없는 강인한 흐름으로 깔끔하고 명쾌한 연주를 펼치고 있다. 이탈리안 피아니스트인 엔리코 파체는 1악장 중반으로 진행되면서 조금은 감정적이고 서두르는 듯한 기색이 있지만 특유의 노련함은 흐트러짐 없는 명징한 음색으로 승화되고 있다. 피아니스트 못지않게 이승원 지휘자의 해석이 귓가에 더 와닿는 것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지휘가 큰 이유인 것 같다. 현악군은 거칠게 긁어대는 질감을 무척 강조하는데 어떤 면에선 '실내악적인 스타일'로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협연자와 오케스트라가 미세하게 호흡이 맞지 않는 부분도 제법 들리지만 아마도 '뮤직텐트'라는 야외무대의 여건 탓이지 않나 싶다. 카덴차에서는 협연자의 템포 루바토가 감각적인 흥분을 안긴다. 이어지는 호른의 어우러짐은 대단히 인상적이며 코다로 이어지는 유려한 흐름은 훌륭한 마무리를 보여줬다.
'2악장'은 제법 빠른 템포로 시작된다. 이 곡을 언급할 때 항상 빼놓지 않는 표현이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다지오"라는 개인적 찬사이다. 엔리코 파체의 가슴 한편을 어루만지는 깊은 타건은 오랜만에 느끼는 시큰한 울림을 안긴다. 마냥 부드러운 음색이 아니라 귓가를 쨍하고 울리는 파열음처럼 강하게 긁는 마찰력도 생생히 전달된다. 곧바로 이어지는 '3악장'은 분명한 방향성을 지닌 해석이다. 빠른 패시지는 다소 불안정한 느낌도 있지만 한편으론 이색적이기도 하다. 감정적인 기운이 앞서면 이성을 잠시 내려놓는 듯한데 이는 피아니스트 특유의 성향이 연주에 반영돼 오묘한 긴장감을 안기는 듯하다. 오케스트라는 마지막까지 매끈한 앙상블로 협연자의 안정적 서포트 임무를 충실히 한다. 예상대로 폭발적인 가속페달을 밟는 연주자들은 피날레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이성을 내려놓는 듯하다. 극적으로 진폭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엔리코 파체의 피아노는 정확한 타건보다는 감정적 그 자체의 흐름이다. 화려한 코다가 마무리되자 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온다. 당당한 열연이었다. 독특하고 혁신적인 피아니스트가 단원들과 이뤄낸 전혀 다른 차원의 열정적인 호연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Encore >
L. v. 베토벤 바가텔 126-4번
엔리코 파체는 독보적인 스타일을 지닌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앙코르 연주를 통해 증명하는 듯한 연주였다. 일반적인 베토벤 스타일이 아닌, 리스트적인 느낌이 강한 연주자인데 그런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은 이질적 감성이 느껴지는 건 필연일 것이다. 오늘 공연을 실연으로 경험할 수 있었음에도 결국 가보지 못한 아쉬움은 그의 연주로 인해 더욱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L. v. Beethoven Symphony No.3 "Eroica"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전 세계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들, 국내외의 저명한 실력자들이 모인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인만큼 상당한 연주력을 들려주고 있다. 우선 1악장 도입부터 상쾌한 음색은 실내악적인 느낌이어서 현대악기로 연주하는 시대악기 연주를 듣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특히 날렵하게 뻗는 현악군 사운드와 깔끔한 앙상블은 대단히 감각적인 <영웅 교향곡>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느낌이다. (잠시 '유튜브 생중계'로 지켜보니 전, 현직 서울시향 수석들도 눈에 많이 띈다)
개인적으론 베토벤 교향곡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은 단연코 <교향곡 3번 "영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나의 생각을 더 확고히 해주는 연주를 만나면 그 순간 폭발하는 아드레날린은 가히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오는데 오늘 연주도 충분히 나의 뇌하수체를 건드리는 좋은 연주라 느껴진다. 목관 파트의 아련하고 묵직한 울림은 특히 2악장 장송행진곡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고음현과 저음현의 유려한 융합이 대단히 감각적이다. 그 위에 얹어지는 오보에, 플루트, 클라리넷의 아름다운 화합은 그야말로 천국에 이르는 여정이다. <영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악장은 또한 2악장이기에 이 순간 어우러지는 화음은 가슴속을 요동치는 충격적 쾌감이자 카타르시스이다. 앞서 <황제>에서 깊고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준 호른 파트 역시 울림이 진하다. 목관에서 저음현이 접목되는 흐름은 베토벤의 신들린 재능이 아닐 수 없다. 도무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절대예술의 경지, 그 자체이다.
빠른 템포의 3악장 '스케르초'는 발랄한 젊은 음악가들의 끼가 한껏 느껴지는 듯하다. 적당한 긴장감과 탄성력이 적절한 균형 관계를 이루는 모습인데 워낙 자신감 있게 터지는 금관군만의 강력한 힘이 더욱 열기를 더하는 느낌이다. 시종일관 활약하는 목관군의 세련되고 탄탄한 연주는 오늘 이토록 훌륭한 <영웅> 탄생의 일등공신이라 할 것이다. 거의 쉼 없이 이어지는 4악장 피날레는 뭔가 어색한 현의 움직임에 당황스러웠지만 곧바로 안정된 앙상블을 되찾았다. 목관 못지않게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여주는 현악군은 그 유려하고 유기적인 움직임에 반사적인 미소가 지어진다. 특히 저음현의 밀당은 숨이 턱 막힐 정도다. 후반부로 이어지는 총주는 '모차르트 모티브'를 그대로 차용한 현악군의 앙상블이 곧바로 '베토벤 고유의 모티브'로 변화한다. 장쾌한 피날레의 정점에 올라서면 밝은 장조의 선율이 어두운 단조로 선회하고 극도의 긴장감이 형성된다. 다시 폭발적으로 파괴되는 오케스트라는 극단의 텐션으로 종결된다. 이승원의 오늘 지휘는 대단히 계산적이면서 치밀한 표현력을 구사하는 해석을 들려줬다. 이는 현시대 음악계의 거대한 흐름을 오롯이 대변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앞으로의 활약이 특별히 기대되는 30대의 젊고 유능한 지휘자를 만난 기쁨 또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