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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진 Aug 02. 2021

자존감에 관한 불편한 단상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만큼 좋은 거울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여름휴가가 시작됐다. 남편과 함께. 둘 다 출근이 일러 평소 아침은 간단히 과일 정도지만 남편이 쉬는 날이면 반드시 아침으로 국과 반찬을 찾는다. 공연히 아이들 반찬도 신경 쓰여 외려 분주한 오전을 보냈다. 어제 끓여놓은 콩나물국이 남아 새로 끓이지 않았는데 남편이 국을 받더니 “쉬었네,” 했다. 아차 싶었다. 콩나물국은 빨리 쉬지.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밑반찬은 주로 사 먹으니 국이라도 끓이겠다는 마음인데 이런 일이 생기면 모두에게 미안해지고 만다. 심지어 ‘요즘 같은 시대’에도.


얼마 전 대학 친구 둘과 만났다. 네 살 아이를 키우며 커피회사에서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는 친구 하나가 최근 연봉 협상에 성공한 이야기를 꺼냈다. 요지는 통역사 시장은 대체로 여자라 스스로 요구하지 않으면 대우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류 회사는 통역사들도 남자들만 쓰고 기본 연봉도 더 높다며. 그리고 아직까지도 얼마나 성차별적 관행이 당연시되는가에 대해 자조하며 덧붙였다.      


“새벽에 혼자 밥 차려먹고 나가는 엄마는 매정하단 소릴 듣는데, 새벽에 혼자 밥 차려먹고 나가는 아빠는 세상 착한 남편이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특정 연령대의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엄마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임에도 세상은 여전히 여자에게, 특히 일하는 여자에게 관대하지 않다. 애는 어쩌고? 남편 밥은 차려주나? 하는 무언의 잣대가 빈틈이 보이기만을 지켜보는 것을 모두가 안다. 지난겨울,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예능에 등장했던 한 여성 정치인의 발언을 기억한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친정엄마와 남편, 아이들에게 늘 빚진 기분이에요. 주말마다 나가는 바람에 남편의 취미생활인 사진 기술이 늘었죠.”


왜 바쁜 아내는 친정엄마에게 빚지고 남편의 사진 기술을 늘려주어야 한단 말인가. 쉬는 날에는 프렌치토스트를 굽는 ‘여성성’을 굳이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인간적인 친근함을 어필하겠다는 의도는 좋으나 보는 이로선 별나라 슈퍼우먼이 마냥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1일 3 피드를 하는 열혈 인스타그래머는 아니지만 꾸준히 계정에 게시물을 올린 지 꼬박 1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었다. 아이는 금방 자라지, 다시 오지 않을 시간, 예쁜 순간들을 담아보자는 취지였고, 복직 후부터는 그나마 교류하던 조리원 동기나 육아 메이트들과도 소원해져 육아 정보나 얻어 보자는 마음이었다.


큰 계정도 아니라 방심하고 아이들과의 일상을 찍어 올리던 중 한 번은 해킹을 당한 일이 있었다. 봇인지 사람인지 모를 계정에 내 아이 사진으로 도배가 된 것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후에는 아이들 사진을 조금 자제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인생은 달콤하지만은 않지. 설탕과 조미료는 사양하겠어. 질척거리지 말자. 평소의 모토를 담아 겸사겸사 이름도 붙였다. 담백한 책생활. 그렇게 내 육아 계정은 ‘북스타그램’이 됐다.      


모든 게 그렇듯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목적과 스타일로 계정을 운영한다. 상업성 계정을 제외한 개인들은 소통 중심 혹은 기록 중심, 단순 정보 습득이나 쇼핑이 목적인 사람들도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스스로 인정하고 싶은 순간과 생각만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근사하게 마련이고 나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근사한 사람이 아닐 뿐이다.


간간히 아이들의 일상과 함께 좋아하는 책들을 올리고 짧은 일기도 썼다. 문제는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리뷰할 때면 과장을 조금 더해 죄책감과 소외감이 버무려진 묘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육아에 실용서만 읽어도 벅찬 시간에 혼자 고상한 척 말랑한 책이나 읽고 있어도 되나.


감히 고백하건대 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 내 의지로 낳은 나의 아이도 나의 일부로서 사랑하는 것이지 아이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미 “엄마”로서의 자아는 일종의 묵직한 책임감이 되어 나를 구성하는 거대한 축을 형성해가고 있다. 일을 하든 안 하든 육아는 기본, 남편 내조에 살림까지 ‘혼자 다하는’ 별나라 슈퍼 우먼. 그것은 나의 욕망인가 세상의 욕망인가. 어쩌면 미디어에서 조장하는 ‘여성성’과 ‘모성애’를 은연중 학습한 결과는 아닌지 되물었다.           




며칠 가정보육으로 어른 책 리뷰할 여유도 없어 아이들과의 일상을 피드에 올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흘 정도 지나면 뭐라도 올려야겠다는 압박이 든다. 이것도 책임감인지, 어쨌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으니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는 영상도 짧게 넣는데 종종 유난스러운 관종이 된 기분에 부끄럽다. 이게 뭐라고. 요즘에야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처음에는 반응이 대체로 이랬다.      


“워킹맘인데 대단하세요.”      


그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속한 직장은 근사하지는 않아도 주 40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는 것 치고는 꽤 여유가 있어 퇴근 후 꼬마들과 노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때 아닌 칭찬을 듣는 것이 민망하면서도 내심 나쁘지 않다. 나는 감정 기복도 심하고 반찬도 사 먹이는 엄만데, 그래도 어쩌면 좋은 엄마일지도 몰라. 그런 위안을 얻는지도.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부모 마음은 당연하며 나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그랬다. 인스타그램은 숨겨진 욕망이라고. 그것이 세상의 기준이든 누군가의 욕망이든 나는 엄마가 된 이상 좋은 엄마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자존감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 높이는 것이라 배웠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존감을 찾는 것은 아닌지 슬쩍 불안해질 무렵, 김이나의 <보통의 언어들> 속 문장들을 떠올렸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만 발견되는 나의 고유한 아름다움, 훌륭함이란 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런 좋은 모습을 볼수록 나 역시도 스스로를 그렇게 믿을 수 있게 된다. 그런 관계에서는 마르지 않는 시너지가 샘솟는다. 지나친 미화에만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당신 곁의 수많은 거울들을 떠올려보라. 어떤 거울 앞에서 나는 가장 괜찮은 사람이었는가?”(p.28)      


인생은 편집이 맞다. 나는 어차피 누구에게도 완벽하게 설명되거나 이해될 수 없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현되는 것이 자아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내 가장 성숙하고 괜찮은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보는 것이 과연 잘못되기만 한 일일까. 그 거울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그 무엇이 되었든 사랑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나를 향하는 편집은 가식과는 결이 다르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도 없고 모두의 마음에 들 필요도 없다. 나를 싫어할 사람이면 내가 공기처럼 숨만 쉬고 있어도 싫어하게 마련이니까. 관계는 태생이 기브 앤 테이크. 살아보니 세상에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더라. (인간이길 포기한 경우를 더러 접하기도 하지만 그건 예외로 하고)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관계가 곧 선이 아닐지. 숨만 쉬고 있어도 나를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제일이겠다.


나는 앞으로도 스스로 만들어 먹기 힘든 반찬은 계속 사 먹을 예정이다. 입맛에 맞고 건강한 반찬 가게를 찾아낸다면 그것 또한 좋겠다. 타인의 평가에 연연할 필요도 없지만 때에 따라서 서로의 괜찮은 모습을 발견해주는 상대와 함께하는 삶도 맛있을 게 분명하므로.


다만 나도 누군가의 자존감에 좋은 거울이 되도록 고슬고슬 맛있는 밥과 신선한 국을 넉넉히 준비해 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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