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라이엇 게임즈와의 인연의 시작
4,436일 간 한 회사를 다녔다. 2012년 2월부터였으니 13년에 걸쳐 한 외국계 게임회사를 다녔더랬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아나운서, 방송진행자 과정을 준비하다 돌연 넥슨, 이라는 게임회사를 사회 첫 발로 선택했을 때도 주변 이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였었는데...
이후 SK커뮤니케이션즈를 다니다 다시금 라이엇 게임즈,라는 낯선 이름의 글로벌 회사로 이직 결정을 했을 때도 수많은 지인들이 우려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 회사에서 지난 13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일했고 정말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이루고 배운 것들도 정말 많았다.
그래서 이 브런치북은 리그 오브 레전드와 라이엇 게임즈와 함께 했던 지난 13년에 대한 회고이다. 또 홍보, 브랜딩, 위기관리와 사회환원 사업 등 본인의 전문 분야에서 겪어온 갖가지 경험과 깨달은 바를 담아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한다.
과거를 더듬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라이엇 게임즈와의 첫 인연은 2011년 9월 경이었다.
한국형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싸이월드>가 새로운 강자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등장에 연일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즈음, 또 전국 3천 3백만 명 이상의 사용자를 보유했던 1등 메신저 서비스 <네이트온>이 스마트폰 시대로의 변화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그 즈음이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 사상 최대의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2011년 7월, 네이트 사용자의 개인정보가 대규모 유출되는 사건이 있었고 50여 일을 밤낮없이 회사를 들락대며 위기관리에 매진했다. 조속히 그리고 정확히 이뤄져야 하는 각종 신고와 사실 확인부터, 대국민 사과 및 후속조치를 밝히는 공식 기자회견, 그리고 각종 집단 소송에 대한 팔로업까지... SK커뮤니케이션즈의 홍보팀 선임 과장으로서 많이 겪고 배웠던 여름이었다. 겪지 않았어도 좋았을 일이었겠지만, 또 당시에는 매우 매우 힘들고 지쳤었지만 지나고 보니 엄청난 위기관리 경험이었다. 그런 동시에 슬금슬금 또 다른 회사로의 도전 욕구가 일기도 했다.
SK를 다닐 때에도 여전히 게임을 좋아했다. 게임업계 지인들이나 미디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을 알게 됐고 북미 서버에 접속해 게임을 즐겼다. 그러다 <리그 오브 레전드>를 만든 <라이엇 게임즈>가 한국 오피스를 세웠고, 그곳에서 홍보를 총괄할 팀 리드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드헌터의 설명을 듣고, 빠르게 면접장을 찾았다. 이직에 대한 강한 욕구와 의지보다는, 게임에 대한 호감이 회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 경우에 가까웠다.
회사는 삼성동의 어느 골목골목 안, 자그마한 빌딩에 위치해 있었다. 30명 남짓의 직원들이 작은 사무실에 가득 앉아 있었고 회의실에도 데스크톱을 설치하고 앉아 근무하는 이들이 있었다. 문득 아... 너무 작은 회사이구나, 생각이 들었었다. 홍보/ 마케팅/ E스포츠를 총괄한다는 권정현 상무와의 면접. (그는 이후 라이엇 게임즈에서 나의 첫 사수이자 보스가 되었고, 한참 후에는 PUBG로 이직하여 미국 시장에서의 E스포츠/ 마케팅 등을 이끌었다) 면접 자체는 흥미로웠다. 미디어에 대해 또 위기관리에 대해, E스포츠 관련 홍보 및 마케팅 경험에 대해 질문이 이어졌고, 영어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대한 대화도 이어졌다. 면접 말미, 권 상무께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며 바로 즉답을 주셨다. 지금까지 홍보 리드 포지션을 매우 오랫동안 찾아왔는데 이 회사에서 찾고자 하는 분에 가까운 것 같으니... 차주 한국 대표께서 출장을 나가시기 전에 빠르게 면접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이때 라이엇 게임즈에 합류하지 않았다. SK커뮤니케이션즈 내에서의 승진, 계열사로의 이동, 또 다른 어느 회사로의 이직 및 결혼 등 여러 가지 변화 고민과 계획이 있던 시절이었고...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덕트 하나를 믿고, 30여 명의 적은 인원으로 한국 시장에 도전장을 내미는 라이엇 게임즈에 합류하기엔 뒷걸음질이 쳐졌다. 그 당시까지 한국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는 <리그 오브 레전드> 장르, 즉 MOBA(Multiplayer Online Battle Arena) 다시 말해 적진점령게임이 흥행을 한 경우가 전혀 없었고...내 스스로 겪어보기에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 게임이다 싶었지만... 만의 하나 그 게임이 잘 안 되면?이라는 질문이 자꾸만 마음 속에 떠올랐다. 지역 오피스이기 때문에, 프로덕트의 성패에 따라 회사의 존속 여부나 내 개인의 커리어에도 위협이 빠르게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주변의 친한 지인들과 이야기를 해봐도 대기업 다니다가 갑자기 그렇게 낯선 스타트업을 왜 가는 것이냐, 회사 이름도 제대로 못 읽겠다, 아무리 게임이 좋아도 그런 무리수를 두는 건 아닌 것 같다.. 부터 결혼도 준비 중인데 이직까지 큰 일을 동시에 두 가지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등의 조언이 돌아왔다. 결국 나 또한 확신이 들지 않아 헤드헌터와 라이엇 게임즈 측의 지속적인 연락에 정중히 거절의 뜻만 반복해서 전했다.
한참이 지나 2012년 1월, 소음이 가득한 식당에서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새로운 기자분의 연락인가 싶어, 얼른 받아 든 전화에서는 매우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라이엇 게임즈에 지난해 10월에 새로 합류한 인사팀장인데요. 우리 기향님께서 작년에 홍보 리드 포지션 면접을 보셨는데... 그 후에 저희랑 인연이 잘 안 되셨다고 들었습니다...(후략)"
현재 라이엇 게임즈 한국 오피스의 대표이사인 조혁진, 당시 인사팀장의 전화였다. 내가 면접을 보던 당시 라이엇 게임즈에는 아직 인사팀장이 조인하지 않은 상태였고 내가 면접만 한 번 보고 꽁무니를 뺀 뒤, 그가 라이엇 게임즈에 합류해 여러 포지션에 좋은 인재들을 채용했다는데... 도대체 해결이 안 나는 포지션 중 하나가 바로 홍보 리드 자리였다 했다. 그 당시 게임업계에서만 80여 명의 홍보 전문가들과 면접을 행했으나 원하는 조건과 인재상이 맞는 인연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니 해결이 쉽지 않은 포지션이었던 건 확실하다. 워낙 자격요건이 까다롭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오진호 한국대표가 인사팀장께 본인 서랍 속에서 이력서 한 장을 꺼내어, 다시 대화를 좀 나눠보라고 한 것이 나였다고. 그래서 문득 커피를 한 번 먹기로 약속을 정했는데, 사실 알고 보니 그것이 인사팀장과의 조촐한 커피타임이 아니라 오진호 한국대표와의 만남을 위한 미팅 요청이었다. 인사팀장과 삼성동에서 만나 한참을 얘기한 뒤에야 한국 대표가 나를 기다리고 있단 소릴 들었다.
여차저차 거절 말씀만 드리게 될 것 같아서 뵙지 않겠다고 미루고 미루던 만남이 4개월 만에 이뤄졌고, 오진호 한국대표의 인상은 매우 날카로웠다. 해외생활 경험이 길고 SK구조조정추진본부를 비롯해 언스트 앤 영, 이베이/옥션 등의 굴지의 회사를 거쳐 라이엇 게임즈 직전에는 블리자드의 한국대표와 아시아대표까지 맡으신 분이었다. 대체 나는 왜 라이엇 게임즈에 지원했었고, 또 왜 그 후에는 달아나 버렸는지... 지금의 커리어와 앞으로의 바람, 계획 등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 문답을 나눴다. 그러던 중 오 대표의 말씀이 나의 눈을 반짝이게 한 대목이 있었다. "사회생활에서 누가 그렇게 가르쳐 주던가. 본인이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지. 그리고 이제 누군가에게 배울 때를 넘었다. 여기서 스스로의 팀, 조직을 꾸리고 본인 만의 홍보를 기획하여 맘껏 진행하시라"라는 말이었다. 당돌하게도 만약 한국 시장에서의 게임 서비스 또는 E스포츠 등이 기대만큼 순조롭지 않으면 한국 오피스와 그 인력들은 어떤 비전을 볼 수 있냐는 질문을 코 앞에서 던지는 내게, 한국 시장의 중요성 등을 거듭 강조하는 한국 대표의 답변은 안도감을 주었고 무엇보다 "지사(Branch)"가 아닌 "지역 오피스(Regional Office)"로서의 전문성과 힘을 갖는다는 이야기에 끌렸다.
그래서 합류했다. (물론 이후 글로벌 임원진과의 면접 및 각종 협의 등 추가 절차가 있었다)
결혼과 신혼여행 앞뒤로 수 주를 빼곡히 업무 인수인계를 했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게 대체 무슨 회사냐, 괜찮은 이직인 거냐, 그런 회사를 갈 거면 우리 회사를 와라...라는 스카우트 제안까지 반응이 꽤 노골적이고 부정적이었지만 확실하게 마음을 먹은 뒤라 딱히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직전 금요일까지 SK커뮤니케이션즈를 열심히 다니고, 애타게 나를 기다리는 라이엇 게임즈 한국 오피스로 그 차주 월요일에 바로 출근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이렇게 이직하는 건 사실 내 건강과 안위를 위해 좋은 선택은 아니다)
라이엇 게임즈는 진짜 이상하고, 재미있는 회사였다. 입사 첫날부터 글로벌 전체 메일을 통해 미국 LA 오피스의 한 베지테리언 직원이 냉장고에 모셔둔 자신만의 personalized 피자를 누군가 먹어치웠다며 범인을 찾는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사실 라이엇 게임즈는 괴짜 회사가 맞았다. 게임을 너무나 사랑하는 미국의 두 청년이 만든 회사였다. 미국 LA의 USC를 함께 다니며 각종 플랫폼의 게임을 함께 즐기던 두 청년. 이들에게 한 아시아 친구가 한인 타운의 PC방을 알려주었고... 그 후 그들은 게임의 천국인 한인 타운 PC방에서 새벽까지 게임을 하고 '북창동 순두부'를 먹고 집에 가는 날이 매우 많았다는데. 참 전설 같은 얘기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정말, 결제 여부에 따라 게임의 난이도나 캐릭터의 능력치가 유리해지는 것 없이... 스포츠처럼 내 실력만으로 이기거나 또는 지는 공짜 게임이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바라고 바라다 직접 손을 걷고 만든 것이 <라이엇 게임즈>란 회사이고,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다.
워낙 게임성이 좋은 게임이었고, 한국 서비스 오픈에 앞서 북미 서버까지 넘어와 게임을 즐기던 사용자들의 계정을 잘 이동시켰다. 그래서인지 2011년 12월 서비스를 시작하고, 본인이 라이엇에 합류한 2012년 2월 경 이미 게임은 인기가 크게 오르고 있었고 서비스 100여 일 만에 시장 점유율 1위를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라이엇 게임즈>를 몰랐다. 라이엇 게임즈의 핵심 철학이라는 '플레이어 중심주의 (Player-focused/ Player-centric)'은 더더욱 몰랐다. 나조차도 그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싶을 정도의 영문 표현이니 시장에서 모를 법했다. 야호, 그래서 더 신이 났다. 홍보가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