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들을 위한 미디어 트레이닝
"치킨을 만 마리 사 먹으려 했는데 그러면 너무 배부를 거 같아서 백 마리만 사 먹어야겠어요. 나머지는 저축하겠습니다.
지난 2013년 10월, 미국 LA의 스테이플스센터의 백스테이지에 위치한 대형 미디어 홀에서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200여 명의 기자/ 미디어와 2013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챔피언십 결승 우승팀 SKT T1간의 승리 인터뷰 시간이 마련됐다. 당시 SKT T1팀의 우승을 만들어 낸 다섯 선수는 '벵기' 배성웅과 '피글렛' 채광진, '임팩트' 정언영, '푸만두' 이정현과 '페이커' 이상혁. 그렇다. 이 날은 오늘날 LoL E스포츠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 손꼽히고 있는 대상혁... 이상혁 선수*의 롤드컵 우승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LoL 프로게이머 이상혁 선수는 LoL 한국 프로리그인 Champions Korea 10회 우승을 비롯해 LoL국제대회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 2회 우승(2016, 2017년)과 세계 최고 권위의 E스포츠 대회로 손꼽히는 LoL 월드 챔피언십 4회 우승을 기록하고,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 중에 있는 선수다. 그는 2023년 영국 '더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 스포츠계 10대 파워리스트'에 리오넬 메시 및 오타니 쇼헤이 등의 전통 스포츠 선수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한데 이 날 각 선수들의 우승소감을 비롯해, 경기 내용에 대한 전략적인 질문 등에 이어 "우승 상금으로 무엇을 할 계획이냐"는 미디어의 질문이 나왔을 때 페이커 선수는 위와 같이 답했다.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러운 결과를 낸 자리. 상징적인 상금에 대한 앞으로의 활용 계획을 물은 질문에 의외로 우리 선수들은 머뭇거리다 농담을 던지거나, 집의 부채를 먼저 갚고 나머지는 저축을 해야겠다는 등의 답변을 내놨다. 뒤이어 좀 더 살아있는 답을 주어도 좋을 질문들에 네, 아니요, 좋아요 등의 단답형 답을 하고 옆 선수에게 마이크를 넘기기도 했다. 현장에서 한-영, 영-한 통역을 맡았던 라이엇 게임즈의 직원은 선수들의 답변 내용이 다소 당황스러울 때마다 “이 내용 그대로 외신들 듣게 번역해도 되나요?"라며 내게 재차 확인했다.
잘못된 답변은 아니지만, 이 날 현장 선수들의 입을 통해... 앗 저것이 저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변이 맞을까,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답이 많았다. 이 모든 미디어 인터뷰 세션이 끝난 뒤 현장서 취재를 하던 한국의 한 스포츠 미디어의 부장이 내게 다가와 "선수들 인터뷰 연습 좀 해야겠다" 조언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우리 선수들이 최고의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기존의 미디어 트레이닝을 강화해야겠다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사실 라이엇 게임즈와 한국 E스포츠협회는 이미 LoL 프로게이머들을 대상 하여, 소양교육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프로 스포츠선수들의 외부 발언이나 인터뷰 문답/ 인터뷰 스킬에 대한 사전 트레이닝 등은 각 스포츠 구단과 협회에서 모두 주도하지만, E스포츠는 일반 스포츠와 달리 게임사의 역할과 의지가 차지하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에 라이엇 게임즈 측에서는 이미 한국 E스포츠 초기부터 한국 E스포츠협회와 함께 소양 교육, 일명 프로플레이어 서밋을 매우 적극적으로 진행해 왔던 것. 해당 교육은 프로게이머들을 대상 하여 프로다운 게임플레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리마인드 하는 것을 비롯해 현행 리그의 다가오는 일정 및 각종 향후 계획이나 비전 등에 대한 사전 공유 등의 중요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그리고 이 소양교육의 일부로, 미디어 대응에 대한 내용도 포함됐다. 이 세션에는 보통 본인이 화자로 나서 우리 선수들에게 <미디어란 무엇인가>, <미디어와 대면하고 인터뷰 등을 임할 때 유념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등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프리젠테이션 형태로 설명하고 예시를 통해 이해를 도모했다. 미디어 문답 내용이나, 비디오 인터뷰를 복기/ 분석하고 미디어 트레이닝을 진행하는 부분은 각 구단별로 자체 진행을 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가 나왔던 것처럼, LoL 프로게이머를 대상으로 한 제대로 된 미디어 트레이닝이 한번쯤 꼭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2014년, 구단별/ 팀별로 진행할 미디어 트레이닝 심화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했다. 그리고는 라이엇 내 E스포츠 담당부서 및 각 구단 측의 협조를 얻어 비시즌 대대적이고 매우 상세한 공부! 의 시간을 가졌다.
미디어 트레이닝(Media Training)이란, 말 그대로 미디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오류 없이 잘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한데 LoL 프로게이머들은 그야말로 프로이기에 평소 프로리그나 국제대회의 시즌 중에는 잠자는 시간과 식사를 하고 짧게 휴식을 하는 시간 외에는 매일 새벽까지 전략을 논하고 게임 연습을 하기에 바빴다. 또 코칭진이나 선수들과도 대화를 나눠보니, 인터뷰 내용을 하나하나 복기하기 쑥스러워서... 또는 비디오 인터뷰 내용 보기가 싫어서 제대로 된 복기나 분석을 하지 않고 넘어간 경우도 많았다 했다.
이에 아래와 같은 골자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1부] 개념 설명/ 업계 전문가 초청 강연
미디어란 무엇인가
인터뷰란 무엇인가
미디어 트레이닝이란 무엇인가
왜 미디어를 잘 대면하고, 잘 이용해야 하는가
업계 전문가(취재 기자/ 부장급) 초청 - 15분 강연
[2부] 미디어 대응 실전연습
미디어가 자주 던지는 질문 제시
그룹별 실질 문답 녹화 (미디어 역할 PR1인 + 프로게이머, 코칭진 3~4인 구성)
PR/ 그룹별 녹화본 분석, Best & Wrost 선별
Best & Worst 팀별 복기, 분석
이 미디어 트레이닝은 미디어, 기자에게서 어떤 질문을 들었을 때에는 무엇이라 답하라 답변을 정해주거나 강요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리 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었다. 나의, 또 우리의 목적은 LoL 프로게이머, 우리 선수들이 미디어를 좀 더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에 총 2부로 이뤄지는 3-4시간 가량의 미디어 트레이닝은 비시즌 중 각 구단/ 팀과 시간을 조율하고 그들의 숙소에 최대한 가까운 공간을 대여해 진행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피치 못할 경우, PR조직이 직접 각 팀의 선수 숙소에 방문해 방문 수업도 병행했다. (사족이지만, 한 프로팀의 숙소에 있어 대형견이 숙소를 방문한 본인을 매우 반가워해 그 또한 거실에 함께 앉아 수업을 진행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미디어가 가진 고유의 속성이나 시절, 시대에 따라 달라져가는 미디어의 변화상 등을 설명하는 동시에 "기자 스스로가 개인적인 궁금증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즉 독자와 팬들을 대변해 공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이에 대해 선수들 한 명, 한 명이 내뱉는 답변이 그대로 활자가 되고 비디오 콘텐츠가 되어 기록되며 팬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점을 이해시키는 데 집중했다.
또 그러한 인터뷰 기회는, Winner 이기에 주어지는 귀한 기회라는 점(오늘날에는 패배팀 또한 미디어 문답/ 인터뷰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건 미디어의 관심은 우승팀, 우승 선수에 집중된다)과 미디어 및 대중의 그러한 관심은 언제든 한 순간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도 최대한 쉽게 설명했다.
때문에 인터뷰를 귀찮아하거나, 쑥스러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팬들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하고, 상대팀에게 도전장을 내밀거나 공약을 걸어 대중의 주목을 극대화하기도 하는 등... 본인과 팀에 도움이 되게 잘 활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점도 구단마다 팀마다 설명했다.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또한 중요한 전달 요소가 된다는 면에서 선수들이 이동차량으로 이동할 때에도 팬들이 또 미디어가 보고 있고 그들을 촬영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비롯해 외모에 지나치게 치중할 필요는 없지만 본인의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 중 어느 쪽이 더 사진에 멋지게 나오는지 등... 또한 한 번쯤 거울을 보며 생각해 보라 이야기했다. 프로게이머는 프로스포츠선수인 동시에 마치 아이돌 스타처럼 팬들로부터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설명하려 노력했지만 휴식 시간을 덜어내 미디어 트레이닝을 받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의외로 우리 선수들은 눈을 빛내며 집중해서 내용을 들었다. 간단히 메모를 하는 선수들도 있었고, 궁금한 점은 재차 손을 들어 물었다. 매일 프로리그와 국제 대회 현장에서 마주치는 것이 미디어 카메라이고, 기자들의 얼굴이었지만 선수들 스스로도 이를 얼마나 가까이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교육이 매우 의미가 있었다.
위와 같이 미디어를 한껏 이해한 뒤에는 더 실제적인 시간을 가졌다. 미디어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질문들부터, 헉 이렇게까지 물어볼까요 싶을 정도로, 거칠고... 끈질기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공격적인 질문에 이르기까지 당황하지 않고 또 전하고 싶은 답은 잘 담아 답변하는 것까지. 팀 전체 인원을 3~4명 수준으로 작게 나눠 진행하는 실습이었다.
E스포츠 경기 후 인터뷰 자리에서는 “승리 소감 어떠냐", "다음 경기에 임하는 각오는", "상대팀에 한 마디 한다면", "응원해 주는 팬들에게 한 마디를 한다면" 등의 질문이 매우 자주 등장하는 데 의외로 미리 핵심 메시지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지 않으면 "매우 좋다", "열심히 하겠다",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등의 판에 박힌 답을 뱉게 된다. 그리고 그런 답은 헤드라인에 오를 수 없고, 흔하고 가치 없는 인터뷰 결과가 된다. 이에 선수들은 보다 구체적인 소감이나, 공약을 말하는 연습을 했다.
따지고 드는 질문에 대해서도 당황치 않고, 유연하게 또 어느 저도 담담하게 하고자 하는 답만을 하는 연습도 했다. PR인원들이 각기 기자의 역할을 하며, 선수들의 답변 모습도 영상으로 기록했다. 코칭진들도 미디어 문의나 인터뷰 요청을 받는 바 함께 연습했다.
이렇게 기록한 영상은 잠깐의 브레이크 타임동안 PR인원들이 나눠 빠르게 분석해 모범이 될 법한 멘트나, 삼가야 할 제스처, 불분명하여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멘트 등을 골라냈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다시 팀 전체가 모여 함께 보면서 난상의견을 모았다.
선수나 코칭진 모두 할수록 늘었다. 또 자신도 모르게 깜박이는 눈이나 마이크를 치는 행동같이...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한 번씩 돌아보며 개선의 기회를 삼았다. 무엇보다 실습과 분석을 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저 때 이렇게 답하면 더 좋았을 텐데!" 하면서 의견을 내는 목소리가 늘었다.
그렇게 총 3개월에 거쳐, 당시 14개 구단의 총 90명 선수들을 대상해 교육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해 5월 프랑스 파리에서 마련됐던 LoL 올스타전 현장에서 우리 선수들이 몸소 그 교육의 효과를 보여줬다. 팬들과 하이파이브하며 적극적으로 교감의 제스처를 보이던 페이커 이상혁 선수, 그 어느 때보다 자신 있는 표정으로 방송 인터뷰에 임하던 매드라이프 홍민기 선수가 그러했다. 하물며 홍민기 선수는 선수단 귀국 비행 편이 들어오던 날 공항에 선수들을 맞으러 나간 나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와 "저 인터뷰하는 거 봤어요? 이번에 엄청 신경 써서 했어요"라 말했다. 세상에... 우리 선수들이 미디어를 진심으로 신경 쓰고 팬들에게 최고의 메시지를 전하려 노력했다!
오늘날 LoL E스포츠 선수들은 10년 전보다 훨씬 말을 잘한다. 페이커 이상혁 선수는 이제 인터뷰의 도사가 된 수준이랄까.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서사를 남기며 2022년 LoL 월드 챔피언십 우승까지 차지했던 DRX의 김혁규 선수는 "중꺾마" 발언으로 이슈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늘 무엇이든 배우고, 알고, 연습해야 준비가 된다. 10년 전 이래선 안 되겠다는 마음에 팔 걷어붙이고 기획하여 모두의 도움으로 진행했던 LoL 프로게이머 미디어 트레이닝. 그 시작이 있었기에 지금 E스포츠 선수들의 발전된 인터뷰들이 보여질 수 있다 본다. 돌아보니 10년 전일이라니. 새삼스럽기만 하지만, 그 시작 그즈음에 우리 모두는 이토록 진심으로 공부하고 연습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