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자책하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의 기술
보통 글을 쓸 때, 여러분이 공감하실 만한 저의 직장 경험을 찾아 서두를 열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글을 준비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운이 좋게도 11년간 7개의 회사를 거치며, 직장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한 경험이 거의 없더군요. 아, 어쩌면 상사나 동료는 시전 했는데, 제가 또 해맑게 흘려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집에서 가스라이팅에 준하는 말을 들어왔다면, 믿기시나요?
"카리나,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걸 왜 기분 나쁘게 듣니? 아직도 멀었구나."
"네가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네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아마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들딸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죠. (아닌가요?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게 칭찬인가, 비난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기분이 안 좋으면 바로 인상부터 찌푸리는 솔직한 미간 덕분에 태도 불량으로 더 혼났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르네요.ㅎㅎ
사실, 이것도 가스라이팅인 줄 모르고 그냥 기분 나빠만 했었는데, 이 용어가 대중화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들었던 저 말들이 바로 가스라이팅이었구나.' 새로운 용어가 나의 과거를 재정의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순간, 이걸 반가워해야 할까요?
아무튼,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 머릿속은 의심으로 가득 찹니다.
"내가 정말 예민한 사람인가?",
"내가 정말 부족한 사람인가?"
이처럼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고, 서서히 나의 자아까지 갉아먹는 이 상황.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대학원 석사 재학생으로서 단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성격이나 예민함은 잘못이 없습니다. 당신을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그 상황과 상대방의 '기술'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자, 본격적으로 무대를 직장으로 옮겨볼까요?
"내가 임 과장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것 하나 못해?"라며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그건 임 팀장한테 굳이 알릴 필요 없었어. 알면 신경만 쓰잖아?"라며 정보를 통제하는 등,
가스라이팅의 기술은 실로 다양합니다. (쓰다 보니 스타트업 씬에서 종종 목격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네요.)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가스라이팅의 대표적인 유형 4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혹시 당신의 트라우마 스위치를 누를까 조심스럽지만, 아는 것이 힘이니까요.
거부/부인하기: "지윤 대리,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지윤 대리가 잘못 기억하는 거야." (기억력 공격)
평가절하하기: "아이고.. 현준 씨. 자네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이거 못 고치면 경력 쌓기 힘들어." (자존감 공격)
조건부 칭찬하기: "이번엔 그래도 보고서가 훨씬 낫네. 다음엔 좀 더 잘하겠지?" (통제력 강화)
책임 전가하기: "이번에 수아 씨가 검수한 PPT에 오타가 너무 많아서 발표가 거의 망할 뻔했잖아." (죄책감 공격)
좋게 말해 꿀밤 한 대, 거칠게 말하면 니킥으로 응징하고 싶은 가스라이터들.
문제는,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순간 '내 탓인가?' 하며 마음이 흔들린다는 겁니다. 그냥 무시하면 될 것을, 도대체 우리 마음은 왜 이럴까요?
우리가 스스로를 탓하는 이유는 '인지 부조화' 때문입니다. (아, 한양대 학부 시절 이병관 교수님께 배웠던 그 이론!) 우리 뇌는 기본적으로 모순을 싫어하는, 생각보다 게으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비둘기파거든요.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순간, 우리 뇌에서는 두 가지 믿음이 격렬하게 충돌합니다.
'상사/동료는 존중해야 하는 존재다'라는 사회적 믿음
vs. '하지만 저 사람은 나를 부당하게 괴롭힌다'는 불편한 현실
이 고통스러운 모순 앞에서, 우리 뇌는 가장 쉬운 길을 택합니다. 거대한 '회사'나 '상사'를 바꾸는 것보다, 만만한 '나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죠. "그래, 저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내가 정말 부족하고 예민한 걸 거야." 이렇게 스스로를 탓하는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인지 조화)를 찾는 겁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그 관계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매달리게 되죠. 왜일까요? 웃기게도 그 나쁜 X들이 던져주는 아주 가끔의 '당근'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나를 무시하고 핀잔을 주던 상사가, 어느 날 갑자기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아영 씨밖에 없어"라며 힘을 실어주는 순간. (지가 하기 싫어서 떠넘기는 건지는 나중에 봐야 알겠지만요.) 우리는 그 가뭄에 콩 나듯 주어지는 찰나의 인정에 강렬한 안도감과 희망을 느낍니다.
"그래, 저 사람도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내가 더 잘하면 인정해 줄 거야"라며 성선설 회로를 돌리죠.
이것이 바로 '트라우마 유대(Trauma Bonding)', 즉 학대 관계에서 형성되는 비정상적인 애착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간헐적 강화(Intermittent Reinforcement)'의 힘으로 설명합니다. 매번 돈을 주는 슬롯머신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슬롯머신에 더 깊이 중독되는 것과 같은 원리죠.
가스라이터가 던져주는 예측 불가능한 '칭찬'이라는 잭팟에 중독되어, 우리는 그 관계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레버를 당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가스라이팅을 시전 하는 상사나 동료는 고통의 원인이지만, 동시에 유일한 구원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특히, 인정욕구, 성취욕구가 강한 분들에게는 동료와 상사가 인정받아야 할 대상이니까요.
이제 그림이 좀 더 명확해지셨나요?
우리가 그동안 무너졌던 것은 결코 우리가 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보이지 않는 심리적 공격, 수동적인 공격을 받아내며
“내가 이상한가?"라는 혼란과 싸우고(인지 부조화),
아주 가끔 주어지는 희망에 매달리며(트라우마 유대)- 험난한 직장이라는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이름이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첫걸음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딱 여기에 해당되겠네요. 다만, 이러한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고 너무 깊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는 마세요.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하되, 거기에 머무르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번아웃, 성취 중독, 그리고 가스라이팅까지 겪고 난 우리에게 남겨진 깊은 무력감에 대해 다뤄보려 합니다. 그리고 무력감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법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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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카리나는..
글로벌 PR과 콘텐츠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해 온 12년 차 홍보/콘텐츠 마케터입니다. IT, 헬스케어, 유통 산업 전반에서 브랜드 론칭과 리드 전환에 전문성이 있습니다.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다양한 조직의 성장을 함께 합니다.
현재 초기 스타트업들의 홍보를 맡은 PR 디렉터이자,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이노베이션 대학원 사회혁신 심리트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일하는 마음”의 구조와 번아웃, 회복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PR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심리학적 시각을 접목해, 직장인의 정신건강과 건강한 조직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전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