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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안 될 거야" 번아웃이 만든 투명한 감옥

당신의 의지를 꺾는 '학습된 무력감'의 정체, 그리고 탈출법

by 카리나

CES 2025 혁신상 도전 당시의 일입니다.


해당 스타트업에 합류하기 전, 회사는 이미 CES 혁신상 도전에 실패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탓인지 회의실의 공기는 '어차피 해봤자 안된다'는 패배감으로 차갑게 식어있었죠. 제품 리뉴얼이 진행 중이라 실물도 없었으니, 어쩌면 그 체념은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대표님은 제게 "이번엔 아영 리더가 한번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지만, 사실 그 누구도 진심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회의 때마다 저를 교묘하게 공격하던 사람(동료라고도 부르기 싫네요)는 이런 말까지 한걸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지금 제품 실물도 없는데 뭐가 되겠어요? 하하하." 대놓고 조롱하는 그 농담. 총기 합법화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싶었습니다. (농담...^^)


이쯤 되면 보통 "에이, 더러워서 안 한다!" 하고 엎어버리는 게 정상인의 반응일 겁니다. 하지만 당시 번아웃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저는,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군요.(번아웃 상태에서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던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네요) 그렇게 저의 '나 홀로 CES 원정대'가 꾸려졌습니다.


디자이너도 아니면서 어설프게 영상툴을 만지고, 지금처럼 영상 제작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기본에 충실자하는 마음으로 10초짜리 제품 영상과 이미지를 제작했습니다. 개발자도 아니면서 제품 스펙을 달달 외운 건 기본이었죠.


그리고 마케팅 PR을 하는 저의 무기인 '스토리텔링' 하나만 믿고, 지원이라고 붙여주신 투자사의 '혁신상 지원서 컨설팅 서비스'만 1시간 받고나서 각자도생으로 지원서를 써 내려갔습니다. 2025 CES 혁신상 지원에 소요된 비용은 0원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다른 회사들은 영상 제작을 외주 맡기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두구두구)

와, 여러분. imagefx가 심정을 꽤나 잘 표현해주네요.gemini


네, 퇴사 후, ’CES 2025 혁신상 수상'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제 100% 기여도로 이뤄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바로 그 성공 말이죠.


제가 이 '성공 신화'를 통해 잘났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해봤자 안될 텐데 뭐"라며 입을 닫아버렸을 겁니다.


하루하루 전쟁 같은 일터에서 번아웃으로 에너지가 고갈되고, 통제 불가능한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깊은 체념,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입니다.




스스로를 가두는 '투명한 감옥'

학습된 무기력


거대한 코끼리를 묶어두는 얇은 밧줄처럼, 과거의 실패 경험은 우리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투명한 감옥'이 됩니다. 저희 동료들이 과거의 실패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주저했던 것처럼 말이죠.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 것은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과 스티븐 마이어(Steven Maier)의 유명한 개 실험입니다. 먼저, 그는 개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우리에 넣고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A그룹(통제 가능): 버튼을 누르면 스스로 전기 충격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B그룹(통제 불능): 어떤 행동을 해도 충격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양'은 A그룹과 동일했습니다. 유일한 차이는 '통제권'의 유무였죠.)


며칠 뒤, 낮은 담장만 넘으면 쉽게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강아지들을 옮겼습니다.

A그룹 개들은 재빨리 담을 넘어 충격을 피했죠. 하지만 충격적인 결과는 B그룹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은 담을 넘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을 그대로 감내할 뿐이었습니다. 첫 실험에서 "내가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절망감을 이미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무력감을 살찌우는 생각 습관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무력감에 빠지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까요?

이는 '통제 소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믿는 '내적 통제자'와, '운이나 타인'에게 달려있다고 믿는 '외적 통제자'로 나뉘죠.


특히 건강하지 못한 내적 통제자들은, 실패했을 때 다음과 같은 '비관적 사고 패턴'을 보이며 스스로를 무력감에 가둡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내가 무능해서 망했고 (개인성),
이 실패 때문에 앞으로 내 커리어는 엉망이 될 것이며 (보편성),
앞으로도 나는 계속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영속성)"


저도 극심한 우울감에 지배될 때는 저절로 이런 생각 패턴에 잠식되더라고요. 무의식적으로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스스로를 탓하고 또 탓하는 그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날 수 없는 느낌.


이런 생각의 습관을 의지만으로 끊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변 사람이 '꼭' 도와주세요


학습된 무력감에 대한 가장 흔한 조언은 '작은 성공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내 행동이 결과를 바꾼다'는 감각을 되찾으라는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조언은 절반만 맞습니다. 이미 비관적 생각 습관이 굳어진 사람들은 작은 성공마저 '운'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일어서기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처음으로 부탁드립니다. 주변에 무기력에 잠식된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소중하다면, 꼭 손을 내밀어주세요.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당사자가 '내 행동이 결과를 바꾼다'는 경험(행동의 변화)'을 다시 하게 하고,

그 경험을 '이건 온전히 네 덕분이야'라고 해석(생각의 변화)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1. 행동의 변화 돕기: '작고 확실한 성공'의 무대 만들어주기

① 과업 잘게 쪼개기: "보고서 다 썼어?"(X) → "보고서 파일만 한번 열어볼까?"(O)
② 완벽한 통제권 위임하기: "점심 메뉴는 당신이 정하는 대로 무조건 따를게."
③ 강요 대신 초대하기: "나 지금 커피 내리는데, 혹시 괜찮으면 한 잔 줄까?"


2. 생각의 변화 돕기: '성공 해석'을 도와주세요.

①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칭찬:
"발표 잘하더라!"(X)→ "자네가 어제 그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정리해 준 덕분에, 발표 때 다들 이해하기 쉬웠다고 하더라. 그 부분 정말 좋았어."(O)
② '귀인 재훈련' 질문 던지기:
상대가 "운이 좋았어"라고 말할 때,
"운도 있었겠지만, 그 운을 잡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었지?"라고 질문해 주세요.
③ 감정은 공감, 사실은 재구성:
"네가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해. 하지만 오늘 네 의지로 산책한 건, 변하지 않는 작은 성공이야."




학습된 무력감,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매우 더딜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내 의지가 약해서 무력감에 빠졌구나'라고 자책하는 분은 없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신의 뇌가 선택한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탓하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무력감은 '학습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타고난 게 아니라는 거죠. 학습된 것은 얼마든지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주변 사람이 이 투명한 감옥에 갇혀 힘들어한다면,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지지해 주세요. 당사자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는 당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그 변함없는 믿음이 그에게는 유일한 숨구멍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카리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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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카리나는..

글로벌 PR과 콘텐츠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해 온 12년 차 홍보/콘텐츠 마케터입니다. IT, 헬스케어, 유통 산업 전반에서 브랜드 론칭과 리드 전환에 전문성이 있습니다.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다양한 조직의 성장을 함께 합니다.

현재 초기 스타트업들의 홍보를 맡은 PR 디렉터이자,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이노베이션 대학원 사회혁신 심리트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일하는 마음”의 구조와 번아웃, 회복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PR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심리학적 시각을 접목해, 직장인의 정신건강과 건강한 조직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전하려 합니다.


https://litt.ly/ka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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