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만 몰라주지?" 실력이 '인정'이 되지 않는 세상을 견디는 법
요즘 AI가 화두죠.
연세대학교 심리과학이노베이션 대학원에서는 '디지털 혁신 심리 트랙'을 운영하고 있는 덕분에, 대학원에서 생성형 AI의 이해 수업을 들으며 매주 피 터지게 공부하고 과제하고 있습니다.
'AI 리터러시'라고 하죠. AI를 활용하는 역량을 저절로 키우고 있는 덕분에 잇몸은 붓고 입술은 터지고 있지만, 덕분에 정말 단시간에 성장하는 스스로가 보여 뿌듯합니다. (그런 걸 보면 '성취'와 '성장'이 저에게는 참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성형 AI를 모두 활용할 줄 알고, 모든 걸 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미 해당 툴들을 누구보다도 잘 사용하면서 교육 콘텐츠까지 만드는 수십, 수만 명의 유튜버들을 보면 존경스러워요.
그런데 말입니다. 지난번과 비슷한 사례를 또 가져왔습니다.
누구나 아는 IT 기업 출신의 수십만 구독자를 가진 한 AI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혼자 또 충격받아 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저격 아닙니다...^^)
해당 크리에이터의 영상은 해외 유명 강의나 뉴스를 그대로 '번역'해서 앵무새처럼 옮기는 수준이더라고요. 아, 네 뭐 그건 좋습니다. 저도 해외 석박사들의 심리학 영상을 보고 한국 상황이나 저의 개인적인 심리구조에 맞춰서 여러분에게 숏츠/릴스나 브런치북으로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보이니까요.
제가 화가 났던 포인트는 대학원에서 배운 생성형 AI의 본질, 그리고 요즘 핫한 툴의 핵심 기능을 다루기는커녕, GPT를 대충 돌린 후 체크하지도 않은 '틀린 정보'까지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팬들과 라이브를 하는 모습을 보고 기함을 토했습니다. 사람들의 댓글은 모두 그를 '역시 AI 전문가'라며 추앙하기 바빴죠.
이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저는 또... (ㅋㅋ) 단순한 실망을 넘어선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왜 또...) 쓰면서도 웃긴데요, 제가 분노가 좀 많은 걸까요? "아니, 저 사람은 앵무새인데, 왜 저런 사람한테 열광하지?"라며 세상이 저를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면 사실, 저는 그 사람의 인기를 '질투'하고 있거나 그 사람만큼 팬을 갖지 못해 '열등감'이 발현된 걸까요? '열광'이라는 것에 아마 질투의 방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곤 생각했죠.
"내가 좋은 회사에 다니지 않아서 그래. 나도 좋은 회사, 네이버 카카오 구글 출신이라고 했으면 아마 사람들은 나에게 열광하지 않았을까?"라며 그 사람을 깎아내리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참 딱하더군요.
또 성격은 시원시원(?)해서 '그래, 그럼 2년쯤 꾹 참고 나만의 방식으로 압도적인 성공을 하면, 그때는 이 억울함이 풀릴 거야. 그냥 성공하자'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감정은 열등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은 공정해야 한다'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깊은 신념이 배신당했을 때 나타나는 '정당한 분노(Righteous Anger)'입니다. (합리화일까요? ㅎㅎ)
심리학자 멜빈 러너(Melvin Lerner)는 이를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Fallacy)'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노력한 사람이 보상받는다"는 공정한 세상을 본능적으로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내일도 출근하고, 주말에 대학원 과제를 하며 노력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앵무새 유튜버'의 성공은 이 믿음을 정면으로 깨부숩니다.
"노력(나)이 아니라 껍데기(그들)가 보상받는" 불공정한 현실을 목격할 때, 우리 뇌는 오류 경보를 울립니다. "세상이 나를 억까하거나, 몰래카메라 하는 기분"을 느꼈다는 것.
그건 이 '공정한 세상'이라는 믿음이 박살 날 때 느끼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존 스테이시 애덤스(John Stacy Adams)의 '공정성 이론(Equity Theory)'을 더하면 더 명확해집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의 투입 대비 결과'와 '타인의 투입 대비 결과'를 비교합니다.
나: (투입: 대학원 공부, 11년 경력, CES 수상) vs (결과: 낮은 인지도)
그들: (투입: 번역, 그럴싸한 포장, 대기업 로고) vs (결과: 높은 인지도, 수익)
이 불균형이 극심할 때, 우리는 '공정성이 훼손되었다'라고 느끼며 이를 바로잡기 위한 강력한 동기, 즉 '분노'와 '짜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서론에서 던진 "2년쯤 꾹 참고 압도적인 성공을 하면, 이 억울함이 풀릴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억울하면 니가 직접 뛰던가 Ver) 억울하면 직접 성공하면 되는거 아닐까요?
아니요. 그건 '성취 중독'(7화)의 쳇바퀴에 다시 올라타는 것일 뿐입니다.ㅎㅎ
왜냐하면,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앵무새 유튜버가 인정받는 세상의 방식'이나 '대중이 나를 알아봐 주는 것'은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 줄리안 로터(Julian Rotter)의 '통제 소재(Locus of Control)' 이론에 따르면, 통제 불가능한 '타인의 인정'에 내 행복과 분노를 맡기는 순간, 우리는 '외적 통제자'가 되어 평생 세상의 반응에 휘둘리게 됩니다. '압도적인 성공'으로 '통제권'을 되찾아오려 하지만, 그 성공조차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완성되기에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게 되죠. (제가 CES 상을 받고도 공허했던 이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요?
당신의 그 '높은 기준'과 '공정성'에 대한 열망은 훌륭한 무기입니다. 그걸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완벽주의자에게 '자기 자비'는 종종 '패배 인정'이나 '기준을 낮추는 타협'처럼 느껴집니다. "뭐가 괜찮아! 저건 사기잖아! 지금 이걸 용납하자는 거야?"라는 내면의 비명이 터져 나오죠.
그래서 우리에겐 '자기 자비 실전편'이 필요합니다. 오늘 '자기 자비'를 주제로 글을 2개나 올리는 이유는 생각보다 제가 마음이 안 잡혀서이기도 하지만, 실전편을 같이 올려드리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연속적으로 올리게 되었어요.
아무튼, 돌아와서. '자기 자비'는 나의 높은 기준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 무기가 '남'이나 '세상'이 아닌, '나의 성장'을 향하도록 방향을 바꾸는 연습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가 난다는 것은 나쁜 게 아닙니다.
"화가 난다"에서 멈추지 말고, "아, 내 안의 '전문성'과 '공정성'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지금 위협받고 있다고 뇌가 신호를 보내네"라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분노를 '나의 가치관을 알려주는 나침반'으로 재해석하고 그 감정을 인정해 주는 것. 이것이 '화가 난 나'를 향한 첫 번째 자기 자비입니다.
'앵무새 유튜버가 인정받는 세상'은 내가 통제할 수 없음을 '수용'합니다.
억울하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대신, 나의 높은 기준을 '내가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가져옵니다.
(❌) "저 사람을 끌어내려야 해." (분노에 에너지를 소모)
(⭕️) "나는 저 사람을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내 브런치 글의 퀄리티를 통제할 수 있다. 나의 높은 기준으로, 나는 '번역'이 아닌 '경험과 이론이 결합된' 나만의 글을 쓰겠다."
이것은 분노할 에너지를 '창조'할 에너지로 바꾸는, 가장 성숙하고 강력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뭐 나에게도 중요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리 중요한가요? 그분들 인정받아서 뭐 하시게요? 연예인 공화국인 우리나라, 가만히 지켜보면 몇십 년 덕후들도 연예인의 실수나 말 한마디로 다 돌아서버리지 않던가요? ㅎㅎ 그런데 뭐가 그렇게 인기가 많아야 하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게 중요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지독한 경험주의자라, 제가 가지 않은 길이 궁금해서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질투하는 것과는 결이 또 다른 이야기인데요. 만약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게 중요했다면 저는 아마 이런 브런치 글을 지난 2019년부터 꾸준히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브런치글은 제가 좋아해서 쓴 거예요.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걸 알아주든 말든. 좋아요가 눌리든 말든 상관없이, 직장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함이었고, 그걸 우연히 좋아해 주신 건데 - 저는 이걸 또 내가 잘해서 그런 거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네요.ㅎㅎ
"네 마음 100% 이해해.
네가 11년간 쌓아온 전문성에 대한 모욕감처럼 느껴졌겠다.
하지만 걔는 '빠른 정보 전달' 게임을 하고,
너는 '깊이 있는 통찰' 게임을 하는 거야. 애초에 트랙이 달라.
단거리 선수 보면서 마라톤 선수가 조급해할 필요 없어.
네 길을 묵묵히 가면,
5년 뒤, 10년 뒤에 웃는 건 너일 거야."
이 말을, 그대로 '나 자신'에게 해주세요.
'불공정함'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게임'이라는 프레임으로 상황을 재해석(인지 재구성)하게 돕습니다. (자꾸 잊어먹지 말아라, 카리나)
"내가 좋은 회사에 가거나,
나중에 크게 성공하면 이 분노가 사라질까요?"
아니요.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할 것이고,
앵무새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겁니다.
'성공'으로 '분노'를 덮으려는 시도(성취 중독)는, 결국 또 다른 번아웃을 부를 뿐입니다. 자꾸 스스로 괴롭히지 마세요.. 제발.
진짜 '승리'는 그들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화려한 무대를 보고도 내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것, 그리고 나의 높은 기준을 남을 향한 '분노'가 아닌 나만의 '깊이'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 그것이 '높은 기준'을 가진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진짜 '프로'의 경지이자, 가장 성숙한 '자기 자비'의 실천입니다.
중심은 늘 내 자신에게 있어야 불안하고 불편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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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카리나는..
글로벌 PR과 콘텐츠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해 온 12년 차 홍보/콘텐츠 마케터입니다. IT, 헬스케어, 유통 산업 전반에서 브랜드 론칭과 리드 전환에 전문성이 있습니다.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다양한 조직의 성장을 함께 합니다.
현재 초기 스타트업들의 홍보를 맡은 PR 디렉터이자,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이노베이션 대학원 사회혁신 심리트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일하는 마음”의 구조와 번아웃, 회복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PR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심리학적 시각을 접목해, 직장인의 정신건강과 건강한 조직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전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