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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덫

나의 높은 기대치가 나를 괴롭힐 때

by 카리나

얼마 전, 평소에 온라인상에서 눈여겨보던 분이 주최하는 한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마케팅 모임은 아니지만, 편의상 그로스 마케팅 현직자 모임이라고 하겠습니다.


평소 틀을 벗어나는 꽤 괜찮은 인사이트들을 공유받고 있어서였을까요.

저도 모르게 모임에서 나눌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모양입니다. (High expectation)


그런데 이럴 수가.


그로스 마케팅에 관심 있는 사람이 gpt한테 물어보거나 조금만 구글링 하면 알 수 있는 수준의 아주 기초적인 지식을 발표로 공유하시는 것을 보고 살짝 당황스러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많이..)


불평불만하는 것 같아 조심스러지만, 많이 놀란 나머지 이 모임이 아예 '그로스 마케팅'의 개념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분들의 모임인가 싶었을 정도였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진정한 초보 그로스 마케터, 바로 접니다.)


해당 모임에 온 분들의 눈치를 살피니, 저보다 훨씬 더 연차가 많으신 분들도 있으셨고 이미 그날 발표 내용을 알고 있으신 유명인사들도 있으셨는데요. 그들은 그렇게 실망하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까지 실망감을 필요 없는데, 왜 그렇게 실망했을까요?

사실 실망하고 말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문제는 단순한 실망을 넘어,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 문득 제가 왜 이러나 궁금하더라고요. 이게 화가 치밀어 오를 일이 아닌데 말이죠.


"아니, 프로가 이 정도 수준을 준비했단 말이야? 아무리 주니어부터 숙련된 그로서 마케터까지, 사람들의 수준이 제각각 다르고 광범위하더라도 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인사이트를 준비했어야지!"라는 비난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요. '이 시간에 차라리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 올게 아니라 잠을 자는 게 나았다'라는 생각이 들며, 선택한 제 자신을 원망하는 양상을 보이며 계속해서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그리곤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분노, 낯설지가 않습니다.


자칭, 타칭 일잘러 동료가 제 기대만큼 결과물을 못 가져왔을 때 느꼈던 그 특유의 짜증.

심지어 저 역시도 제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에 못 미쳤을 때, 스스로를 질책했던 그날 선 감정과 정확히 똑같았습니다. 저는 왜 '그럴 수 있지'라며 쿨하게 넘기지 못하고, '내 시간을 빼앗겼다'며 분노할까요? 이미 흘러간 시간, 주워 담을 수 없으면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왜 이렇게 저는 화가 나고 자책을 심하게 했을까요?





'훈장'인 줄 알았던 '완벽주의'라는 덫


이 모든 고통의 뿌리에는 '높은 기준',

즉 '부적응적 완벽주의(Maladaptive Perfectionism)'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완벽주의'를 "전 뭐 하나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서요^^"라며 능력의 훈장처럼 여겨왔습니다. 물론 심리학에서도 긍정적인 '적응적 완벽주의(Adaptive Perfectionism)'를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높은 기준을 추구하되, 그 과정 자체를 즐기고 실수에서도 배울 점을 찾습니다. '최선을 다하자!'는 건강한 동력이죠.


하지만 저의 모임 경험처럼 실망이 '분노'로 변하고, 동료를 '짜증'으로 대하며, 스스로를 '질책'하게 된다면,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는 '부적응적 완벽주의'로, "실수는 용납 못 해. 100점이 아니면 0점이야"라는 두려움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덫에 빠진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결과물에만 집착합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비현실적으로 높다는 것이죠. 그 기준을 달성하지 못할까 봐 끊임없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성공을 해도 안도할 뿐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고, 작은 실수 하나에도 '나는 실패자'라며 자기 가치 전체를 흔들어 버립니다.


돌이켜보면, 이 완벽주의야말로 '성취 중독'의 강력한 연료였습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라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동시에, "어차피 100점 못 할 바엔 시작도 안 해"라며 시도조차 포기하게 만드는 '학습된 무력감'의 씨앗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완벽주의'라는 훈장은,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던 셈입니다.



완벽주의자가 세상을 보는 법

(feat. 내 안의 폭군)


완벽주의자는 세상을 왜곡된 렌즈로 봅니다.

바로 '인지 왜곡'이라는 렌즈입니다.

첫째, '흑백논리적 사고(All-or-Nothing Thinking)'입니다. 회색 지대가 없습니다. 오늘 간 세미나가 '완벽하게' 좋지 않으면 '완전히' 시간을 날린 쓰레기입니다. 회사에서는 상사, 후배, 동료가 '완벽하게' 일하지 않으면 '무능'한 것으로 여깁니다.


둘째,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Should Statements)입니다. 이 '당연히'라는 폭군이 바로 제 분노의 근원이었습니다. "강사는 당연히 내 기대만큼 최고여야 한다."

“동료는 당연히 내 수준만큼 해야 한다."

“나는 당연히 실수하지 말아야 하고, 최고의 선택만 해야 한다." (제가 저를 원망한 이유죠.)


이 '당연히'라는 잣대가 '그럴 수 있지'라는 유연함을 막아버리고, 내 시간(세미나), 동료(일 처리),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모든 분노와 짜증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해독제: '자존감'이 아닌 '자기 자비'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난 잘났어!", "난 성공했어!"라며 '자존감(Self-Esteem)'을 끌어올리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성공한 나'(100점짜리 나)만 인정하는 '조건부 사랑'입니다. 100점을 못 받는 순간,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성취 중독'만 심화시킬 뿐입니다. 결국 '자존감'은 성과주의자의 마약 같은 거였습니다. 약발이 떨어지면 금단현상(자기 비하)에 시달리게 되죠.


진짜 해독제는 '평가'가 아닌 '수용'입니다. 바로 '자기 자비(Self-Compassion)'입니다.


자기 자비의 창시자인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는 이 해독제에 세 가지 성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친절하기: 100점이 아닌 세미나에 실망해서 화가 난 나를 비난하는 대신, "그럴 수 있어. 기대가 컸으니 실망할 만했네"라고 다독여주는 것입니다.

보편적 인간성: "어떻게 저 강사가 저런 수준의 강의를 할 수 있어? 우리 모두의 시간을 빼앗다니.. 너무하네."가 아니라, "세상 모든 세미나가 좋을 순 없지. 누구나 실수하고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어. 나도, 동료도, 저 강사도." (이것이 바로 다른 참가자들이 편안해 보였던 이유일 겁니다.)

마음 챙김: '아, 내가 지금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화가 났구나'라고 감정에서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80점짜리 나를 환영하는 법


높은 기준을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그 기준을 '당연히' 채워야만 한다는 흑백논리를 버리자는 겁니다. 100점이 아닌 80점짜리 결과도 '성공'으로 인정해주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가장 강력한 실천 팁을 하나 드릴게요. 스스로를 향한 비난이 시작될 때, 잠시 멈추고 "가장 친한 친구가 이런 일로 괴로워한다면, 뭐라고 말해줄래?"라고 질문을 바꿔보세요. 아마 "네 시간을 빼앗겼네!"라며 같이 화를 내기보다, "에이, 똥 밟았다 생각해. 그 시간에 잠 못 잔 게 아깝다. 잊어버려"라고 따뜻하게 위로해 줬을 겁니다.


하나 더, 완벽하게 시간을 날린 그 모임 덕분에 이 글을 쓰게 되었네요. 문득 생각해 보면, '완벽한 나'를 추구할수록 저는 부서졌지만, '실망한 나'를 안아주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단단해졌습니다.


완벽주의자 여러분, 여러분의 그 높은 기준이, 오늘 하루 당신을 몇 번이나 찌르지는 않았나요? 자꾸 선택을 잘못했다고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마세요. 인간은 실수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흑백논리는 버리고 유연해지자고요. 아시잖아요. 세상사 다 뜻대로 안 되고 조금 유해야 살기 편하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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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카리나는..

글로벌 PR과 콘텐츠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해 온 12년 차 홍보/콘텐츠 마케터입니다. IT, 헬스케어, 유통 산업 전반에서 브랜드 론칭과 리드 전환에 전문성이 있습니다.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다양한 조직의 성장을 함께 합니다.

현재 초기 스타트업들의 홍보를 맡은 PR 디렉터이자,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이노베이션 대학원 사회혁신 심리트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일하는 마음”의 구조와 번아웃, 회복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PR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심리학적 시각을 접목해, 직장인의 정신건강과 건강한 조직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전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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