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좁고 웃을 일은 많지.
나이가 들수록 말수가 적어지고 드센 기도 수그러들 줄 알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젊을 때 한 짓들이 민망해서라도 조금은 착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참아왔건만 어찌 된 일인지 날이 갈수록 사람을 괴롭게 했다. 웬만하면 이기기 힘든 상대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여봐란듯이 뒤돌아 나오려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멋진 승리의 날을 꿈꾸던 나는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집을 뛰쳐나왔다. 바람, 도박, 손찌검, 별의 별 꼴을 다 봐왔는데 오늘 아침 카레에서 나온 짧은 머리카락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남자의 머리카락인 것을 내 것이라 닦아세우는 통에 이 사달이 났다.
갈 곳이라곤 얼마 전 결혼한 큰 딸, 민서의 신혼집뿐. 민서네 동네로 가는 유일한 버스를 삼십 분간 기다려 타고 한 시간을 달려갔다. 토요일이면 이른 아침부터 민서와 사위가 시댁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무턱대고 집 앞까지 갔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아직 안 나갔으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위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뭘 해도 허허 웃는 사람이라 이른 아침 난데없이 나 왔네 하고 들어서도 허허하겠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민서야, 오늘도 일찍 시댁에 가니? 사실은 네 아버지랑 다퉈서 생각 없이 나와버렸다.
민서에게 조심스레 문자를 보내자 아홉 시쯤 나간다며 일단 와 있으라는 반가운 답장이 왔다.
이미 집 앞이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시계를 보니 8시 37분이었다. '이십 분 정도면 뭐.' 근처 공원에서 기다리려는데 쌀쌀해진 날씨 탓에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시내와 떨어진 아파트 단지라 카페는커녕 편의점도 하나 없었다. 바로 그때 눈 앞에 보인 것은 atm(현금자동입출금기)이 있는 농협이었다. 겨울에 가까운 가을이라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야외에 앉아 있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농협으로 들어갔다. 걸터앉을 선반이 없어 우두커니 서서 시계를 다시 보니 8시 45분이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쥐가 나서 일어섰다가를 반복하는데 토요일 아침에 농협 atm을 이용하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돈 빼가는 소리가 아주 고약했다. 집을 나서면 문자 하겠다던 민서의 소식을 기다리며 폰의 잠금화면을 켰다 껐다 하고 있었다. 그때 깡 마른 체구에 위아래로 등산복을 빼입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남편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잠시 잊고 있던 카레 머리카락 사건이 떠올라 새롭게 화가 나려던 순간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오토바이가 부릉대며 관통하는 듯했다. 부르르르르르릉.
실내엔 나와 그 남자뿐이었다. '설마 저 사람..?' 하며 고개를 드니 '등산복'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atm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 벌어져도 저렇게 태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실행하십시오'라는 안내말이 몇 번 흘러나오고 부릉대는 소리가 두세번 더 울린 뒤에야 볼일을 끝냈는지, 남자는 들어온 길을 따라 나갔다. 집을 나서면 연락을 준다던 딸의 소식은 시계침이 9시 30분을 가리키도록 오지 않는데, 생뚱맞게 남의 활발한 장운동소리나 듣고 있자니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었다.
등산복은 떠났지만 등산복의 냄새와 나는 남았고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등산복의 뻔뻔함에 자꾸 웃음이 나와서 쭈그리고 앉아 킥킥대고 있으니 남자가 흘끗흘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냄새의 근원지를 나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엄마, 지금 출발해요. 들어와서 있는 거 잘 챙겨 드시고 푹 쉬세요.
문자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나왔다. 나의 소행도 아니었고 다시 볼 사람도 아닐 테지. 오랜만에 상황이 우스워 웃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딸의 아늑한 공간에 드디어 도착했다. 완전한 가출이 아니어서 저녁이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야겠지만 낮동안이라도 편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문득 시원한 사이다가 마시고 싶어 바로 근처에 있는 구멍가게로 갔다. 냉장고로 직진해 사이다를 꺼내 계산대에 놓자 가게 아저씨의 손이 머뭇거리는 것이 보였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잠깐 봐 주느라 계산이 서툰가 싶어 얼굴을 보았다. 킥킥대던 날 쳐다보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