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법 스물세째
1.
연애의 일상이 때로는 스무고개 게임 같다. 연애의 일상 중 많은 날들을 온종일 연인의 감춰진 진심이 무엇인지 알려고 질문하면서 보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애하며 연인에게 이 연애의 종착점은 어디고, 어떻게 그곳에 닿으려는지, 또 내가 가려는 종착지에 함께 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관한 정답, 곧 연애의 목표와 방식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고 묻고, 또 묻는다.
정답을 찾아야만 좋은 연애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연인이 생각하는 연애의 종착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아야만, 자신의 것과 비교하여 종착점에 걸맞는 수준의 적당한 마음을 쏟아서 괜한 애정으로 얻을 '상처'를 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 각자가 종착지에 도달하는, 그리고 연애의 속도와 편안함을 결정하는 방식에 관한 정답을 알아야만 연애가 던지는 피로감에서 얼마간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고 믿는 것 같다.
연애의 스무고개 게임은 정답있는 게임인가?
과연 연인을 향한 질문으로 얻고 싶은 '정답'이 있을까?
2.
연애를 두고 하는 스무고개 게임에 고정된 정답은 없는 것 같다. 연인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함께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에 따라 달라지고, 그때마다 연애의 목표와 연애하는 방식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연인에 대한 확신으로 종착지를 정하고, 그 곳을 향하여 맹렬히 달리는 연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첫 날의 이끌림이, 몇 달의 애틋함이, 나아가 몇 해의 편안함이 연애의 종착지를 변하게 만든다. 연애의 방식에 관하여도 마찬가지다. 연애의 방식은 연애의 일상을 보내며 새로워진 자신과 연인의 모습에 따라 변하게 된다. 일관된 취향, 가치도 있지만, 다양한 경험이 그것들을 변하게 하는 법이다.
결국 연애의 스무고개 게임에는 정답 대신에 정답을 찾으려는 욕망만 있는 것 같다. 정답이 있고, 그것을 찾아야만 연애의 상수인 불안이 자신을 덜 괴롭힐 것은 생각에서 정답이 있다고 의지적으로 믿고, 상상 속의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정답이 없어서 질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미지의 존재인 연인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는 없고, 미지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급적이면 많은 질문을 해야한다. 다만, 정답은 상상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문답의 과정에서 중요한 점을 달리 생각해야 할 뿐이다.
3.
중요한 것은 '정답' 그자체일 수 없고, 질문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연인과의 문답으로 얻으려는 것은 연애에 관한 공통의 이해(understanding)이다. 좋은 연애가 무엇인지, 좋은 연애를 만들기 위한 각자의 의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함께 만든, 좋은 연애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하나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 질문들은 그때그때 연애의 방향을 결정한다. 각별히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첫째, 설명할 수 없는 '직관'에 바탕을 둔 질문을 멀리해야 한다. 질문에는 응답이 따라나온다. 문답은 대화의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소통되지 않는다면 질문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자신의 직관은 질문할 자신의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상대가 질문 받아한다고 납득할만한 이유가 되기는 어렵다.(직관은 설명되기 어려운 것이 본질이니까.) 질문하는 이유가 불분명하면, 질문하는 목적이 의심받기 쉽다. 더욱이 질문은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지만, 때론 의심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질문이 연인에게 의심의 메시지를 은연중 전달한다면, 질문 하나로 신뢰에 금이 갈 수도 있다.
둘째, 연인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염두에 둔 정답으로 몰아가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질문하는 권리에는 응답을 성실히 들어야할 의무가 부과된다고 할 것이다. '성실한 청취의 의무'에는 답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만큼이나 내용에 대해서 가급적 선입관을 배제하고 청취하는 것이 포함된다. 심정적으로 확실한 것이 있더라도 연인관계에서 진실은 둘 사이에 공통된 이해가 자리잡기 전에는 무엇하나 진실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믿는 진실만큼이나 상대가 말하는 진실에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해야만 '성실한 청취'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진실에만 천착해, 연인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면 질문하는 이유가 사라지고 문답으로 맺어진 연인으로서의 권리, 의무 관계도 깨진다. 결국 연인은 이와 같이 질문하는 태도에 '무시'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셋째, 연인의 역질문에 성실히 응답해야한다. 연인은 동등한 존재이며, 동일한 권리를 얻고, 의무를 진다. 상대가 질문하고 자신이 성실히 응답한다면, 동등하게 자신도 의문이 생기는 데 대해 질문하고 성실한 응답을 받길 연인에게 원할 것이다. 질문의 권리와 답할 의무가 연인과 자신 사이에 비대칭한 관계를 이룬다면, 곧 일방만 답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질문으로 관계를 풀어가려던 의도는 관계를 망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권리와 의무가 비대칭한 관계에서 동등한 존재로서 자신과 연인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넷째, 연인의 응답하지 않을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연인에게 어떤 질문이라도 할 수 있다. 연인의 과거 연애사, 개인적 아픔 등등 자신이 좋은 연애를 만들어가는 데 꼭 알아야한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든 물을 수 있다. 다만, 무엇이든 물을 수 있어도 모든 질문에 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답하는 입장에서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함구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함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질문하는 이유는 상대를 난처하게 하거나, 상처주려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응답하지 않으려는 연인의 판단을 존중하고, 그의 답하지 않을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물론 꼭 답을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 때는 상대의 자유를 빼앗는 순간 질문할 권리도, 연인으로서의 위치도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섯째, 질문하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은 알고 싶은 것을 아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에서 질문은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전술하였듯이 '좋은 연애'를 만드는 것이 그것이라고 하겠다. 즉 거짓이 없고, 모호한 데도 없이 서로에 대해서 잘 알아서,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아서 후회없이 사랑하고, 원없이 사랑받고 싶어서 연인에게 질문한다. 그런데 때로는 진정한 목적을 잊고 의혹을 떨치는 데만 관심을 갖고 연인을 거친 내용과 격앙된 어조에서 초래된 무례로 서운케하고, 무시로 상처입힌다. 질문에 얻어진 '앎'은 좋은 연애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의혹에 사로잡혀 질문하더라도 늘 존중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조심성이 필요하다. 조심성은 목적을 잊지 않는 것으로부터 갖춰질 것이다.
4.
연애의 일상은 질문하고 답하는 대화로 구성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질문하고 답하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연애는 피로감이 없지 않을지언정 발전가능성이 높다. 괜한 이야기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위험이 있더라도,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전가능성은 '정답'이라는 문답의 결과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연애의 일상에서 고정된 정답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발전가능성은 연애를 발전시킬 정형화된 행동 메커니즘으로서 문답에 있다. 문답의 정착은 어떤 변화가 유발하는 '미지'에도 공포에 빠지지 않고, 미지를 '앎'으로 바꿀 수 있는 유연하고 역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연애에 불어넣는다. 발전가능성은 노력없이 얻을 수는 없다. 숨겨진 정답을 찾으려는 노력 이상으로 질문하는 태도를 바로 잡아서 질문하는 좋은 습관을 만드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 습관은 쉽사리 생기지 않는 법이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을 억제하며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