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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Nov 22. 2017

연애공개, SNS라는 "늪"

연애법 스물다섯째

1.

연애는 지극히 사적인 일이다. 그래서 연애하는 당사자를 제외하고 연애의 내밀한 이야기는 당연하고, 연애 상태에 대해서도 타인이 알아야할 일말의 필요는 없다. 누가 물어보면 감추지 않고 떳떳하게 연애사실을 공개하면 연인 사이에서 크게 문제 될 일이 없다. 그뿐이다.


엄밀하게 타인과 대면해서 만나고, 대화하는 상황에서는 전적으로 그렇다. 만나지 않고, 묻지 않는 데 연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때로는 대화의 상대방에게 시끄러운 소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묻지 않고, 말해야만 할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이야기 꺼낼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만 사람을 대면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과 얼마간 SNS로 대화를 나누며 산다. 먹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놀고, 웃고, 분노하는 일상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SNS에 사진과 짧막한 글로써 공개하고, 자신의 피드에 올라온 타인의 SNS에서 그의 동향과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이 상당부분 일반화되었다. 곧 우리는 공개와 확인의 방식으로 가상세계에서 대화를 나누며 타인과 관계맺고 산다.


실제 세계와 가상 세계인 SNS 공간은 상대와 대화하고 관계짓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SNS 공간에서는 어떨까? 누가 묻지 않으면 특별히 연애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2.

단언컨대 SNS 공간에서는 다르다. SNS 공간에서도 누군가 연애에 대해서 물을 때까지 ‘비공개’가 흡사 답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비공개를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흡사 답인 '연애 비공개'로 인하여 언짢아질 수도 있다. 자신과 자신의 일상을 일방적으로 ‘공개’함으로써 성립하는 SNS의 대화방식으로 인하여 상대방에게 SNS에 공개하지 않는 어떤 이야기에 공개하지 않는 숨은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심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곧 먹고, 놀고, 만나고, 일하는 SNS에 공개된 일상 중에 ‘왜 하필’ 연애는 빠져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의심이 초래될 수 있다.


비공개는 상대로 하여금 연인의 일상에서 자신이 갖는 중요도를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SNS에 공개되는 피드와 글자 수가 연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사실이 결합하면 비합리적인 의심이 초래되기도 한다. 곧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은연중에 입밖으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는 믿음연애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결합하여 연인이 자신과의 연애를 혹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공개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다.



"감추려고, 감추려고 애를 써도 감출 수 없는 석류의 말, 곧 사랑의 기록이 감춰질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마음대로 평가할 위험이 ‘비공개’에 의해서 초래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비공개는 연애에 대한 ‘확신’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다. 연애는 항상 언제 끝날지 모를 불안을 등에 지고 있다. 이러한 연애의 불안은 SNS를 통한 연애 비공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성립하게 만든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우연하게 일어난 것처럼 끝도 사고처럼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연애를 공개하는 일은 합리적이지 않다. 새로운 시작을 어렵게 만들고, 괜한 오해에 휩싸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신이 들기 전에는 공개하지 않는 게 맞다.” 


이러한 믿음이 마음 속에 자리 잡으면, 연애를 공개하지 것을 단순히 공개하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어렵게 된다. 곧 비공개를 공개를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상대를 오해하도록 만들어 비공개 앞에서 ‘이 연애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공개하지 않는 거다.’라는 의심에 휩싸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비공개로 인한 이와 같은 오해는 연애에 치명적이다. 연인관계라고 하더라도 SNS는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공개해 달라고 요구하기 힘들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이다. 결국 언짢은 한 사람만 끙끙 앓도록 괴롭히는 결과가 초래되며, 자신과의 연애를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휩싸여 연인의 사랑하게 만들었던 다른 이유들을 잊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걱정과 서운함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연애의 여타 사건에서처럼 상대의 입장에 대해서 ‘짐작’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짐작만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잘못된 반응으로 외려 상대의 오해를 살 위험이 커지고, 그 위험이 자신에게 또 다른 위험을 키워 연애의 전망을 어둡게 할 수 있다. 곧 이 짐작이 진정으로 오해라고 해도 대화 나누지 않는다면, 해결의 가능성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소한 오해가 거대한 이별로 연애를 종지부 찍을지 모른다.

(말하지 않는 연애의 문제에 대한 글 : https://brunch.co.kr/@karmarete/2)



3.

결국 늘 그렇듯이 해결되지 않더라도 말하는 수밖에 없다. (SNS를 하지 않는 것이 답이라는 말은 답으로써 성립하지 않는다. 문제가 없는 데 해결책을 찾을 필요가 없잖은가!)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이 문제를 연인이 쉽게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르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화를 나누며 작은 이해, 작은 위안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려드는 연인으로 인하여 더 큰 고통을 떠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기는 커녕 벗어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그래서 현재를 견딜 수 없어서 바꿀 기회라도 얻으려면 말해야 한다.




오해에 휩싸여 홀로 괴로운 것보다는 이야기해서 문제를 꺼내놓고 함께 고민하고, 태도와 행동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악화되더라도 이를 계기로 연애에서 문제가 생기는 진정한 원인-대화나누기 힘들고, 때로는 두려운 현실-을 마주하고서 진정으로 행복한 연애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오해에 휩싸여 혼자 마음을 닫는 것보다 서로에게 안타까운 연애의 종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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