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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Dec 20. 2017

공감(Empathy), 동정 아닌.

연애법 스물일곱째

이 글에서 담고 있는 좋은 연애에 대한 생각은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친밀한 관계'에 입각한 것임을 주지하는 바이다.

(참조 : Anthony Giddens, 1992. The transformation of intimacy : sexuality, love, and eroticism in modern societies, Cambridge, UK : Polity Press.)





1. 들어가며


연애의 시작이 외로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연애의 시작은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 침전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한 강렬한 끌림이 자신과 연인 사이의 거리를 다른 어떤 타인과의 거리와 비견할 수 없이 좁게 만들어 자신이 홀로 외딴 곳에 있지 않다고 믿게 만들지만, 어떤 끌림은 외로움의 심연으로 자신을 끌어당겨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암흑의 지하에서 방치되었다고 믿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연애하는 동안에도 불안을 완전히 거둘 수 없고, 연인을 향한 갈망을 거둘 수 없다. 즉 연애하는 동안에도 외롭지 않기 위해 애쓰고, 외롭지 않기 위해 연인에게 기대하게 된다.


외롭지 않은 연애를 위하여 우리에겐 연인의 공감(empathy)이 필요하다. 우리는 연애하는 동안 자신의 생각의 무게와 감정의 깊이가 가리키는 눈금을 읽고, 얽힌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연인과 교감하고 싶다. 그것만이 외로움에 벗어날 수 있는 진정으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공감하고 소통하는 연애야말로 서로 단순히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외로움의 심연에 빠지지 않게 딛고 설 수 있는 땅이 되고, 타자들의 바깥 세계로부터 스미는 외로움의 냉기를 막아주는 서로의 벽이 되어 함께 존재하는 연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이라는 말은 연애에서 거대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공감할 수 있는 능력, 곧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면, 그가 가진 어떤 매력도 연인이 가진 자산을 연애라는 명목 아래에서 가지려는 목적의 연애 이상의 연애를 지향하는 사람이 피해야할 상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 결국 공감은 연애에서 이뤄야할 인간적 소통의 조건이며, 좋은 연애의 결과를 함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공감’이라는 개념이 언제든지 상대에게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의 긍정적 성격 탓에 개념이 품은 뜻에 대한 성찰 없이 상대의 공감을 무분별하게 요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공감이 아니라면 상대가 마치 좋은 연애를 함께 지향하는 연인으로서 결격 사유가 있는 것처럼 간주하곤 하기 때문이다. 공감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뿌연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다. 운 좋게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지만,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희뿌연 안개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가야한다. 힘들게 시작하고 ,애써서 지켜온 지금의 연애를 허사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진전시켜야한다. 즉 공감이 갖는 의미를 밝히고, 그 의미로부터 자신을 단속하고, 연애하는 상대를 존중하며 더 나은 연애로 진전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막연한 것이라도 해답을 가져야 한다.


1) 공감이란 무엇인가?

2) 공감하는 소통을 위한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2. 공감이란?


공감은 대개의 경우 ‘동정(sympathy)’과 혼동을 일으키곤 한다. 흔히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만큼 상대도 같은 무게로, 같은 깊이로 상대도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동감이라고 믿는다. 일견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해의 정점에는 상대에 대한 완전한 감정이입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공감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과 다른 상대의 그것들의 자리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동정'을 떠올리며 '공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동정은 상대에게 압도되어 상대에게 완전하게 감정이입하는 것을 뜻한다. 즉 상대의 감정과 생각만이 표정과 행동을 만드는 유일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정에서 타자의 공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나의 생각과 감정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몰입, 완전한 감정이입의 최후는 타자의 독자적인 생각과 감정이 배제되고, 타자의 것이 곧 자신의 것의 복사물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지경에 이를 위험이 있다. 이 상태에 이르면 연인 사이에서 객관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나는 나이고, 너 또한 나인 상태가 곧 이들의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동정의 감정을 느끼는 연인에게 깊은 애착을 느끼게 될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타인이 취하는 어떤 모습보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인에게 일체감을 느끼고, 융합(fusion)이 이루어진 관계로서 거의 모두는 이 연애의 종말이 마치 자신이 쏟을 수 있는 모든 사랑의 끝과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동정으로 맺어진 관계는 안정이 아니라 불안에 휩싸이기 너무나 쉽다. 자신과 연인 사이의 작은 차이는 ‘동정’에 대한 기대를 동요시키기 때문이다. 동요할 수록 연인에게 자신의 동정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연인을 바꾸려고 시도하게 된다. 연인을 변화시키려는 도전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선택부터 이따금씩 삶을 휘감는 고통으로부터의 구원까지 상대에게 의존하려는 의존성을 보이게 된다. 연인이 항상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고, 자신과는 융합된 존재인만큼 늘 좋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동감과 혼동되는 동정은 이렇듯 연인 사이의 애착에서 상대에 대한 중독에 이르기까지 명암을 동시에 갖는다. 물론 공감과 오인한 동정에 대한 지속적 기대는 관계를 진전시키기 보다는 악화시킬 위험이 더 크다. 동정에 대한 열망이 연인 사이의 개인적 경계를 허물 뿐만 아니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성을 보존하는 경계가 없는 공간, 즉 오롯이 자신을 위한 공간 없는 연애에서 질식할 위험을 결코 피할 수 없다.


공감은 동정과는 다르다. 공감은 기능적으로 타자의 감정을 공유하는 능력이며, 타자가 느끼는 감정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인식적 능력이며, 그리고 타자가 겪는 고난에 연민으로 반응하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이 타자에 대한 ‘연민’(또는 동정)을 느끼는 감정 작용을 함축하고 있지만, 연민은 결코 동정이 아니다. 공감은 동정과 달리 개인적 경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타자의 영역에 흡수되는 동정의 영역과는 달리 공감의 영역에서 연인의 감정에 압도 당해 자신의 감정을 잃고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킨다. 연인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슬픔에 깊이 침잠하지만, 압도당하여 자신의 영역을 결코 잃지는 않는다.

(경계에 관한 글 : https://brunch.co.kr/@karmarete/4)


공감적 관계에서도 동정적 관계와 마찬가지로 상대에 대한 애착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 양상은 매우 다르며, 동정적 관계보다 관계의 지속과 진전을 위하여 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 먼저 동정적 관계의 가장 큰 장점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여는 점에 있다. 타자가 자신의 동일자로서가 아니라 개별적 타자로서 존재할 때에 비로소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개인적 경계는 이를 가능하게 해준다. 의사소통은 상대의 생각과 감정에의 종속이 아니라, 타협과 협상이 관계를 주도하는 논리가 될 수 있게 만든다. 이를 통하여 관계 내에서의 누구 하나에게 권력이 쏠린 관계가 아니라 균형적인 관계를 모색하고, 어느 일방이 주도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듬어 주고 보살핌 받는 상호성이 성립하는 데도 기여한다.


공감하는 관계에서는 연인이 가진 생각과 감정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개인적 경계 아래에서 관찰자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친밀한 관찰자를 얻는 쪽에서는 연인의 시선을 자신의 잘못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로서 얻을 수 있다. 즉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를 연애 관계 안에서 공론화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공감으로 맺어진 관계는 서로 성장하기 위한 발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개인적 경계를 두고, 서로의 개인성을 존중하며, 서로의 미흡을 성찰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을 연애관계에 연다. 개인성을 관계의 위협을 받아들이고, 일방의 생각과 감정에 쏠려 반대편의 일방의 개인성이 결코 숨쉴 수 없는 동정과는 달리. 결국 공감은 연애를 각자 자신의 삶을 일구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장소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3. 공감하는 태도


공감을 원하고 입장공감을 요구받는 입장에서 태도를 달리 찾아야할 것이다. 공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일방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연인에게 공감해주길 바라는 동안에 연인도 자신에게 공감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연인 사이에 공감에 대한 욕망이 서로 충족할 때 비로소 공감이 진정으로 연애관계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감하는 연애를 바란다면, 공감을 원하는 입장에서, 또 공감을 요구받는 입장으로서 태도를 고민해야 봐야 한다.

('공감을 요구받는 입장'이라는 말은 과격할지 모른다. 그저 우리는 연인에게 공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감을 원하는 입장에 대칭하여 이와 같은 다소 과격한 표현을 썼다는 것을 사족으로 적는다.)


먼저 공감을 요구받는 입장으로서 세심한 관찰과 자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공감은 상대의 표정, 음성, 태도, 행동을 지속적으로 모방하고 동화시키는 의태(mimicry) 작용과 자신의 의태에 대한 상대의 반응에 대한 반응을 내보이는 피드백(feedback) 작용의 반복을 통하여 상태의 감정이 자신에게 전염(contagion)되어 상대의 감정을 깨닫게 되는, 일련의 인식적 작용을 통해서 이루어 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상대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를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상대의 감정을 외부적으로 투사하는 모든 매체로부터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있을 때, 공감을 위한 인식적 작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상대에게 적절한 반응을 보이며, 제대로된 공감을 위해서는 반응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표정 짓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반응이 사뭇 상대의 생각과 다르다면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공감적 작용은 오랫동안 간극을 좁히기 위한 노고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공감을 요구받는 입장에서 세심한 관찰을 통하여 공감을 위한 좋은 출발점에 서고, 세심한 행동으로 공감을 형성하기 위한 노고를 줄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 공감을 원하는 입장에서도 자중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연애관계의 중심에 선 동안에 공감작용이 일어나는 중심 공간 역시 자신의 영역에 다소 치우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감이 일방적 작용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자신을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여 행동하며 마음을 헤아려주는 동안에도 상대를 향한 자신의 반응을 멈출 수는 없다. 자신의 상대에 대한 성의있는 반응이 상대의 더 많은 이해와 보살핌, 곧 공감적 태도를 이끌어낼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치우쳐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고, 애쓰는 마음에 일말의 관심을 보이지 못한다면 공감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예컨대, “이게 다야”라고 상대에게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연애관계를 더 이상 지속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거나(극단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실망으로 관계를 지속할 수 없을 때), 적어도 공감을 원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연인의 반응이 자신이 원하는만큼의 공감이 아닐 수 있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연인은 가장 친밀한 사람이지만,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결국 공감하는 연애를 만들려는 연인은 상대에 대해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중하는 태도로 상대를 대하여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연인의 타자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할 타자로서 존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너는 나다.”라는 단정적 믿음을 마음에 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대하는 모든 태도에 “너는 왜 내가 아니고 너인가?”라는 의문을 품는 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며


공감은 다른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연애에서 중요하다. 아니 특별히 더 중요하다. 공감은 연인과의 의사소통이 성립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서로 깊이 이해하는 인식적 작용으로서 연애의 지속과 진전을 결정하는 요건으로서 특별히 작용한다. 즉 공감은 연애의 시작, 진전, 끝을 모두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감하지 않는 연인과의 연애를 두고 결코 좋은 연애라고 평가할 수 없다.


이토록 중요한 개념이지만, 공감은 동정과 흔히 혼동을 일으키면서 연애관계를 악화시키는 대표적인 개념으로 의심받곤 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대부분 공감의 상호성을 배제한 채 공감하진 못하는 상대에게 혐의를 씌우면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공감을 동정과 혼동하는 데서 시작한다. 즉 공감은 동정과 달리 연인 사이에 개인성, 혹은 타자성을 옹호하지만, 동정과 혼동되어 마치 ‘공감’이라는 말 아래에서 연애가 일방의 생각과 감정에 흡수되는 관계를 좋은 연애로 잘못 표상하게 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연애에서 갑을관계에 대한 생각도 어쩌면 동정과 혼동된 공감으로부터 일부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공감의 자리를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지점을 상징하는 ‘공감’과 같은 개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는 그 지향점이 어디인지, 어떤 길을 피해서 지향점으로 나아갈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 즉 공감을 바라지만 공감의 뜻을 제멋대로 생각한다면 결국에는 공감에 이르지 못하고, 공감을 가장한 ‘무엇’을 두고 다투다 관계를 끝내버리고야 만다고 할 수 있다.


공감은 결코 동정이 아니다. 공감은 개인적 경계를 두고, 타자로서 개인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고서 성립하는, 결코 상대에게 흡수되는 관계를 함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은 연애를 공감으로부터 사유하고자 한다면 상대의 생각과 감정이 표출되는 표정, 음성, 태도, 감정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조심성 있게 반응해야 한다. 또 공감을 원하는 한 쪽에서 상대가 내게 공감하기 위하여 보여주는 성의에 대해서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섣부른 판단을 자중해야 한다. 요컨대 공감은 타자성을 전제하고 시작하는 의사소통적 작용이다.



<참고>

*. Elain Hatfield, Richard L. Rapson, and Yen-Chi L. Lee. 2009. “Emotional Contagion and Empathy” in The Social Neuroscience of Empathy, Cambridge, Mass. : The MIT Press. p. 19.

**. Elain Hatfield, Richard L. Rapson, and Yen-Chi L. Lee. 2009. “Emotional Contagion and Empathy” in The Social Neuroscience of Empathy, Cambridge, Mass. : The MIT Press. 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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