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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Dec 30. 2018

설국

낯선 시간과 불안한 시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고향집을 향하는 길에서 만난 풍경은 설국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짙은 눈이 몇 개의 터널을 두고 끊어졌다가 다시 세찬 눈이 시야를 가리길 반복했다. 그리고 고향집에 닿기 전 거쳐야 하는 마지막 긴 터널을 지나자 설국이 펼쳐졌다.


몇 달 만에 다시 고향집에 가는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1년이 못 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주 오랜 방황 끝에 돌아가는 기분이다. 유난히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을 먹어도 원하는 방식과 방향으로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현재가 싫었고, 미래는 언제나와 같이 내 것이 아니었다. 현재가 싫은 만큼 미래는 내게서 더 멀리 거리를 두었다.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과 늘 함께였다.


추위가 엄습하기 전 어느 날 마음을 정리했다. 결정을 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불안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만큼만 곁에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불안을 감당하기에 너무 지쳐 있었다.


성장을 꿈꾸며 살았다.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항상 성장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었다.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서 스스로의 장벽을 깨고 나가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거듭된 도전은 나에게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안정된 터를 닦고 그 위에서 성장을 위한 도전을 하는 것이 지난 삶을 통해서 적절한 것임을 배웠다. 마음은 거듭된 도전을 이겨나가는 나의 모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할 때였다. 있는 그대로의 나, 살아온 모습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때였다.


마음을 정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안이 조금 걷힌, 어쩌면 불안을 유보한 내 얼굴에서 어머니는 평안을 읽으셨다. 그리고 조금 더 단단한 평온의 터전을 얻길 기대하셨다. 


그런 날이 올까, 

만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지난날처럼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인정해도 마음에 불안이 남았다.


생각해보면 모든 불안의 시작은 집을 떠나면서 시작되었고, 집을 떠나 만난 사람과 세계는 항상 나에게 변화를 요구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적응이라고 불렀다. 적응은 어제까지 나였던 것 대신에 새로운 오늘의 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그때마다 수많은 ‘나’들 사이에서 다름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저항했지만, 성공적이지 않았다.


집을 떠나자 평안이 모든 낯 섬의 시작이 되었다. 적응해야 했던 상황마다 나로서 살아온 지난날의 나를 어루만지기보다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고민했고, 불안하지 않은 시간이 낯설게 되었다. 안정이 찾아왔을 때조차 다음에 있을지 모를 일에 대비해야 했다. 그렇게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는 나를 충분히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휴일을 주었지만, 휴식을 주지 못했다. 불안이 그 증거였다. 고향집을 향하는 마지막 길목, 긴 터널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떠올리며 긴 터널을 지나 만난 설국은 지난날의 삶과 다른 낯선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지난날의 불안, 내가 조우해야 했던 낯 섬이 낳은 감정을 떠올렸다. 집을 떠나며 시작되었던 불안, 그리고 평안이 낯설어진 생활을 떠올렸다. 


나는 나를 다른 방식으로 사랑해야 했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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