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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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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Sep 28. 2019

불을 끄며

오늘 내가 사랑한 풍경들.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던 일주일을 마무리했다.

홀로 연구실 불을 끄며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을 한참 바라봤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 났다. 눈 앞에서는 오래된 블라인드 틈새를 가녀린 빛이 겨우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은 이미 지난여름 찬란하게 빛나며 그 누구도 그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날 찬란했던 그 빛이 처량해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사랑했던 대개의 풍경이 사라졌듯이 내가 사랑하는 오늘의 풍경들도 흩어질까 두려웠던 거다. 스무 살에 처음 만난 서울의 풍경들을 너무나 달라졌다. 내가 사랑했던 광화문의 스타벅스, 청송대 모처의 벤치, 하염없이 걸어도 나를 내친 적이 없던 신촌의 밤거리는 이미 내가 사랑했던 그 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풍경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랑하는 오늘의 풍경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그것이 겁이 났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언가 할 수 없이, 휩쓸릴 위기에서 공포는 찾아오곤 한다. 무엇이라도 할 것을 찾아야 두려움으로부터 약간의 자유라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하는 일에는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공포를 물리칠 방법이 달리 없는 것이다. 다만, 그저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작별해야 할 때 아쉬움이라도 덜 남도록 더 열심히 사랑하는 것은 할 수가 있다.   


선생님께서는 종종 꿈을 크게 꿔야 그 깨어진 파편도 크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생님의 '꿈의 파편론'과 달리 사랑은 그것이 깨어질 때 큰 것이었을수록 '위협적'이다. 큰 조각일수록 큰 상처를 남기고, 마음 한구석을 더 크게 도려내 공허를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크게 사랑하는 것이 때로는 미련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게 있는 마음만큼 더 크게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만이, 또 사랑할 수 있음만이 이 세상에 내가 나 자신을 따뜻하게 여기게 만드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불을 끄고 하루를 마감한다. "수고했어, 오늘도 어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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