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기쁨과 슬픔
4호선 이수역 지하철 천장이 빗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사당역 지하철로 향하는 계단은 워터 슬라이드를 연상케 했다. 강남도 무사하지 못했다. 강남역 지하상가는 물바다가 되었다. 서초 아크로비스타의 엘리베이터는 하염없이 빗물을 흘렸다. 지하 주차장엔 무릎까지 물에 찼다. 논현동 대치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리의 하수관이 빗물을 분수처럼 품어냈다.
감당할 수 없는 폭우는 거리도 덮쳤다. 이수 교차로를 통과하는 차들은 5미터 이동하는데 2시간이 소요되었다. 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버스 실내까지 물이 들어찼다. 버스니까 그래도 물을 밀어내며 이동이 가능했다. 골목 안쪽엔 차량이 물에 잠긴 채 방치되어 혼자 쓸쓸히 나를 구해달라며 비상 깜빡이를 켜고 있었다.
8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는 무언가 경고라도 하는 듯 비를 퍼부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강한 비는 멈출 줄 모르고 내렸다. 2022년 8월 9일, 서울은 다시 80년대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80년대 여름 서울은 자주 물에 잠겼다. 출근하는 직장인들은 저마다 우산을 손에 들고 물길을 헤치며 출근했다. 어떤 이는 뗏목을 타고 낭만을 즐기기도 했다. 뉴스 인터뷰에 등장한 엣된 청년은 여름철 물놀이가 따로 필요 없다면서 우스갯 말로 슬픔을 떨쳐냈다.
13년 전 일이다. 아침 뉴스에서 88 올림픽대로 여의도 부근이 통제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베트남 출고가 있는 날이었다. 여의도 통제 소식에 출근 지연을 떠올렸다. 밥을 한 술도 뜨지 못하고 황급히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올림픽대로보다 좀 더 위쪽에 도로, 노들길로 출근할 요량이었다. 다행히 남들보다 조금 서두른 탓에 출근길 정체는 피해 여의도를 통과했다. 63 빌딩까지 무사히 지나왔는데 그때부터 차가 밀려 있었다.
경찰들이 노들길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찰들은 영등포 쪽으로 길을 내어주며 돌아가라고 지시 중이었다. 노들길을 통과하면 강남까지 15분이면 갈 것을, 경찰이 열어주는 노량진을 돌아가며 적어도 40분은 걸려 입에선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40분 더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론 3시간이 걸렸다. 새벽 6시 30분에 집에서 나왔고 회사에 도착하니 9시 30분이었다. 출근 시간을 처음으로 30분 넘겼다. 출근 지연이 예상돼 회사에 전활 걸었더니 일찍 출근한 김대리가 괜찮다며 천천히 오라 했다.
내가 속한 팀에서 가장 먼저 출근한 건 김대리였고 다음이 나였다. 출근하자마자 앉은자리에 전화가 울렸다. 팀장님이었다. 다음은 사원들. 전화가 연이어 계속 왔다. 모두 다 늦는다고 했다. 사연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1호선이 멈췄다. 4호선이 멈췄다. 차가 안 움직인다. 버스가 안 온다 등등. 결국 팀원들이 모두 모인 시각은 낮 11시 30분이었다.
다 모임과 동시에 점심 먹을 생각도 못하고 에이전시에 가야 했다. TOP 샘플을 발송하고 검사받고 출고 레터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에이전시가 있는 역삼역 사거리에 오후 3시에 도착했다. 평소였다면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는데 장마로 인한 피해 덕분에 4배 시간이 더 걸렸다.
에이전시 담당자의 얼굴이 창백했다. 자신도 늦게 출근했고 늦게 출근한 덕에 업무가 자꾸 지연되고 모든 일이 예정보다 늦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당자의 기분 상태라면 TOP 샘플도 거절당할 듯했다. 하지만 예상상과는 달리 선뜻 그냥 샘플만 놓고 가라며 Shipping letter를 보내주는 것이 아닌가.
오늘 전달한 TOP는 본 작업 전부터 문제가 연이어 발생한 스타일이어서 출고 전까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출고 수량도 5만 장이나 되는 중견 스타일이었기에 에이전시로 향하는 내내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었다. 만약 거절된다면 다음 시나리오를 어찌 가져가야 하나, 사고 보고서는 또 어떻게 써야 하나, 전무님께는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출발한 에이전시 길이었다.
아침엔 하늘을 원망했는데 오후엔 하늘에게 감사한 일이 생겼다. Shipping letter가 전송된 것을 확인하고 사무실 김대리에게 전화해 기쁜 소식을 알렸다. 전화를 거니 더 기쁜 소식이 들렸다. 거기서 바로 퇴근하라는 즉퇴 공고가 떴다는 것이다. 비 피해로 퇴근 지연이 예상되어 자택에서 업무를 보라며 지시가 떨어진 것이었다. 나쁜 일도 겹쳐서 오고 기쁜 일도 겹쳐서 오는 것인가. 오후 5시 퇴근이라니 수화기를 통해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집까지는 또 4시간이 넘게 걸릴 것 같았다. 마음의 짐 하나 사라지니 4시간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역삼동 건물을 빠져나와 강남역으로 좌회전하니 수많은 차들이 제자리에 주차되어 있는 게 보였다.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먼길을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차를 돌려 회사 근처에서 숙박도 생각한 날이었다.
2022년 8월 10일 아침, 자고 일어나니 카톡 앱은 빨간 숫자로 +999개 메시지가 도착해 있음을 알렸다. 밤새 내린 폭우 영상과 사진이 단체 카톡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밤사이 벌어진 수많은 일을 카톡을 통해 확인했다. 이수역 근처에 커피숍을 운영 중인 재민 형님은 자신의 커피숍이 이수역보다 살짝 지대가 높아 비 피해를 피해 갈 수 있었다며 안부를 전했고 라데는 어젯밤 버스에서 4시간 넘게 갇혀 있었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지금은 회사라며 카톡을 남겼다.
그나저나 또 비가 내린다. 이런 와중에도 직장에 출근하는 직장인들 그리고 밤사이 비상근무로 잠 못 잔 공무원들, 비 피해를 온몸으로 겪은 많은 분들이 걱정된다. 예로부터 현자들은 위로 대신 풍자를 사용했다. 매일이 힘듦의 연속이지만 웃음만은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태양이 간절한 날이다.
폭우에 출근 걱정하는 사람은 삼류다.
폭우에 출근 못 하는 사람은 이류다.
폭우에 출근하는 사람은 어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