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 투성이 인생에 찾아온 책 한 권
오류였다. 내 인생은 오류 투성이었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당시에는 동경했던 삶이 딱 그랬다. 인생에는 뜻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건이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이랬다.
오류는 모 중소기업에 10년째 근무 중이었다. 매달 25일은 베트남 혹은 캄보디아 해외 공장에서 의류 출고가 있는 날이라 바쁜 날. 출고일을 하루 앞둔 어느 일요일 오류는 낮술 중이다. 월요병을 달고 살았다. 월요일이 너무 싫었다. 얼마나 싫었으면 일요일 낮 12시부터 술을 몸에 부었다. 오후 5시간쯤 연달아 마시면 정신이 혼미해졌고 그대로 집으로 가서 뻗었다. 12시간을 그렇게 잠을 청한 뒤 맑은 정신으로 월요일에 출근했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섬유 무역 회사 업무는 늘 똑같았다. 물론 출근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이나 이걸 지키는 사람은 딱 한 명 봤다. 회장님. 그 외에 모든 직원은 대부분 출근 시간을 어기고 퇴근 시간은 없었다.
출고해서 메일함을 연다. 탕비실에서 맥심 믹스 커피 2봉을 미지근한 물에 타서 원샷한다. 전날 마신 혼미한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메일함의 안 읽은 메일의 개수가 100개. 팀장님이 오기 전까지 2시간 동안 100개의 메일을 회신하기로 한다. 다행히 오전 출근 시간 전이라 집중해서 업무 처리가 가능하다.
오전 9시, 전화벨이 여지없이 울린다. 분명 해외 공장이고, 출고를 맞출 수 없다는 전화가 분명했다. 받기 싫었다. 전화벨을 아무도 모르게 무음으로 전환했다.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드디어 100개 메일의 회신을 끝냈다.
"정대리, 이리 들어와 봐." 전무님의 호출이다.
후다닥 윗도리(웃옷) 걸치고 전무님 실로 다다닥 달려갔다. 어제 올린 '사고 보고서' 때문이리라. 현재 오류가 근무하는 무역회사는 사고가 나기 전에 미리 사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사고가 처리된 뒤에도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 보안으로 따지면 이중 보안이나 마찬가지다. 전무님이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사인을 하신다. 다행이다. 하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하루가 길게만 느껴진다.
무음에서 다시 전화벨로 바꾸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는 둥 마는 둥, 옆자리에 김대리가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자고 한다. 사실 담배 필 시간 조차 없는데 그냥 따라 나갔다.
담배 한 대 겨우 피고 들어왔더니, 자리에 메모가 붙어 있다. '전무님 실'이라고 적혀있다. 올 것이 왔다. 도망가고 싶었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을 보냈다. 옆자리에 팀장님은 공장과 통화 중이다. 이걸 안 해주면 어떡하냐, 우리가 돈이 어딨냐, 공장이 책임을 져줘야지. 밥 먹을 시간도 없다. 팀장님의 레퍼토리는 여전하지만 공장에선 요지부동인가 보다. 전화를 끊을 생각을 안 한다. 퇴근 시간은 이미 2시간이 지났고 밥은 생각조차 없었다.
'이대로 살기 싫다.'
내년에 내가 팀장이 되면 지금 팀장님이 하는 소리를 내가 해야 한다 생각하니, 마음속에서 그랬다. 이렇게 살기 싫다고.
"팀장님, 저 이번 주에 월차 좀 쓸게요. 목요일 하고 금요일요. 출고도 끝났으니 바람이나 좀 쐬고 오려고요."
가끔 답답했고 심장이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성과와 승진에 눈이 멀어 월화수목 금금금을 외치며 회사에 충성했던 시절이었고, 매일 늦은 야근으로 저녁 식사는 항상 치맥이었던 시절이었다. 거부하지 않고 참석했던 술자리는 고스란히 불어난 살로 돌아왔다. 어느새 해마다 양복을 새로 맞추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몸은 불어 있었다. 머리는 항상 띵했다. 머리가 맑으면 이상할 정도였다.
스트레스가 스트레스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해마다 건강검진을 받는데, 솔직히 검진 결과는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의사 소견에 재진이라고 적혀 있어도 바쁨을 핑계로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심장이 전보다 많이 조여 오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건강 적신호였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자리에 그만 주저앉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는데 호흡이 얕았다. 그렇게 10분이나 있었을까. 다행히 통증은 사라졌다.
'스트레스 때문인가.'라고 생각했다.
평일 낮의 김포공항은 한산했다.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니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이런 여유가 낯설게 느껴졌다. 쉬는 날 없이 달려오다가 갑자기 여유가 주어지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김포공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눈에 들어온 작은 서점.
'그래, 책 한 권 사자.'
그렇게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를 만났다. 비행기에 탑승해 눈을 질끈 감았다. 책을 구입하긴 했지만 지금 읽긴 싫었다. 제주도까지 잠을 자려는데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영화를 보려는 데 집중도 안됐다. 그래서 책을 펼쳤다. 책의 주인공은 홍대리, 오류는 정대리. 뭔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눈으로 책을 훑다 유독 눈길을 끄는 구절을 만났다.
“진짜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냐?"
"그래. 어제 영만 선배 보니까 정신이 확 들더라."
"방법이 있긴 한데. 해볼래?" 명훈의 말에 홍 대리는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 그게 뭔데?"
"독서."
홍 대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생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에게 주는 해답이 독서라니,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말이다. 그러나 명훈이 장난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아니 장난으로 독서를 입에 올리기엔 명훈은 책을 너무 사랑했다.
"네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 독서에 달려 있다면 어떻게 할래?"
"독서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평생 텔레비전 보면 인생이 바뀔 것 같냐?"
"아니."
"평생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 인생이 바뀔 것 같냐?"
"아니."
"그럼 책을 읽는다 해도 니 인생이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냐?"
홍 대리는 선뜻 "아니"라도 대답하지 못하고 테이블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24P)
'뭐야, 책 읽으면 변한다는 건가? 고작 책 읽는다고 변한다는 게 말이 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홍대리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이 보였고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책을 읽고 독서 모임에 나가고 책을 점점 더 많이 읽고 결국엔 일과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오류도 해보고 싶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면 바로 실행하고자 다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해보면 알겠지 뭐. 혹시 알아? 내 인생도 바뀔지.'
간절했다. 답답했고 출구라곤 보이지 않는 꽉 막힌 인생을 살던 오류에겐. 어디론가 떠나야만 그나마 가슴이 뚫려 자주 밖으로 떠났다 돌아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가야 편안함을 느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자유로웠다. 그렇게 여행을 밥 먹듯 다녔다. 여행은 떠날 땐 좋았지만 돌아올 땐 지옥 같았다. 패턴은 언제나 똑같았다. 여행은 답이 아니었다. 다른 답이 필요했다. 혹시 책에서 하란대로 하면 달라질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답은 간단했다. 해보면 되는 것.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접으면 그만이니까. 주변에 독서 모임 하는 친구가 있던가? 한 명 있다. 휴대폰에 이름을 검색하니 전화번호가 없었다. 돌아가면 전화번호부터 수소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제주도에 도착하는 안내 방송이 귓가에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