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트쌤 May 15. 2023

읽지 못하는 학생을 가르치라고요?

영어 못 읽는 학생 고등학교 보내기

"원장님, 오늘 새로 온 신규생 수업을 못하겠는데요? 못 따라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영어를 못 읽어요"

"그래서 심각한 수준이라고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성적이 안 나와서 그런 줄 알았죠. 읽지도 못하는 학생을 어떻게 가르쳐요. 이 친구 초등학생 반에서 phonics 먼저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자존심 상해서 싫데요. 어머님도 아이 상태를 알고 많은 거 바라지 않으시니까 부담 없이 수업하셔도 돼요"


신규생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원장님께서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언질을 주셨지만, 설마 하니 중학교 2학년이 영어를 못 읽을 거라고는 아예 생각도 안 해봤기에 그저 단순히 성적이 바닥을 치고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 학생에게는 그저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로구나' 딱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당연히 수업시간에 책만 다보고 앉아있는데 아이도 답답했겠지만 수업을 진행하는 내 눈에 다 보이는데 나 역시 마음이 편한 상태가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가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는 나에게 문제를 읽고 풀어보라고 책을 들이밀면 어떻겠는가! 그 상황을 누군들 좋아할까?


그 당시 아이에게는 위의 비유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남학생은 그래도 동생들과 phonics부터 시작하는 건 창피하다고 같은 학년 반에 넣어달라고 해서 앉아는 있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놓여있었고, 그 아이의 처지를 알고 있는 같은 학교 다니는 친구들만 웃고 있었다.

지금은 자유학기제로 전환되면서 중학교 1학년이 시험이 없어졌지만(그마저도 정권교체와 함께 다시 부활한 학교도 있다) 그때는 1학년도 똑같이 일 년에 4번 학교 시험이 있을 때였다.

1학년 동안 4번의 시험을 경험한 후 이대로라면 아이가 고등학교를 못 갈 것 같다고 판단하신 어머님이 공부 안 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시켜달라고 원장님께 애원하다시피 해서 등록을 한 학생이었다.

원장님도 처음에는 안 받겠다고 거절하셨던 학생이라는 건 훗날 원장님과 독대한 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영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학 성적도 만만치 않게 형편없는 학생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영어 성적이 30, 성적은 두 번째 문제였고 일단 영어를 아예 읽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내신대비를 하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대충 감으로 찍어서 객관식 문제만 풀었다고 한다. 서술형은 손도 못 댔을 테니 그래도 이 정도 점수라면 대충 찍어서라도 풀었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아이의 태도였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뭐든 할게요. 못 읽으니까 무조건 외우기라도 할게요. 저 그냥 이 반에서 수업 듣게 해 주세요"

중학교 2학년, 누군가는 중2병이라고 부르는 허세 가득한 한창 사춘기가 제대로 왔을법한 시기에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창피함을 견뎌내고 아이가 수업시간에 스스로 나에게 부탁했다.

"선생님, 얘가 공부는 못해도 의리는 끝내주거든요. 착하기도 엄청 착해요. 선생님이 하라면 할 거예요"

같은 반의 소꿉친구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까짓것 본인이 하겠다는데 힘들어도 견디겠지 싶었다.

"우선은 목표를 이번 중간고사를 50점 넘기도록 해보는 걸로 하자. 교과서를 못 읽으니까 본문을 외우는 건 무리일 것 같으니 우선 시험범위에 나오는 단어라도 외워서 시험을 보는 걸로 해보자"

보통 내신대비 기간에 기출문제를 풀리는데 한 달 동안 1000제를 풀게 한다. 다만 이 친구는 읽지를 못해서 속도가 나지 않으니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풀고 시험 범위에 있는 단어를 외우게 시켰다.

한 달을 고생한 후 영어시험 전날에는 직보(직전 보충)를 위해 최종점검까지 마친 후 중간고사를 보고 왔다.

시험이 끝난 후 본인도 점수가 궁금했겠지만 나도 다른 학생들보다 유독 이 친구의 성적이 기다려졌다.


"가채점해봤어? 몇 점이야?"

아이가 학원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먼저 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묻지 않아도 만족할 만한 점수를 받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선생님 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어 50점 넘겨봤어요. 가채점해봤는데 52점 나왔어요"

"우와! 정말 잘했다 우리 둘 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영어 내신 1등급인 학생이 이 글을 읽으면 52점 가지고 뭔 호들갑이냐 코웃음 치겠지만 사실상 영어 문맹인 수준의 아이가 중간고사에서 52점을 냈다는 건 대단한 성과였다.

공식 점수 발표 때 확인해 보니 가채점 결과대로 점수가 변동 없이 그대로였고, 영어뿐만 아니라 수학도 성적이 대폭 상승했다. 수학은 외국어가 아니므로 문제를 알아듣고 푸는데 별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2학년 1학기 첫 중간고사에서 원하던 영어 성적을 얻은 아이는 그대로 탄력을 받아 계속 공부를 이어나갔고 중학교3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 영어를 88점 받아오는 기특한 성적을 내게 안겨줬다.

2년 동안 피나게 노력한 끝에 얻은 값진 결과였고 영어를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었기에 90점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부모님과 본인 모두 만족할 성과를 얻었고 결국 집 근처에 위치한 원하던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성적이 대폭 올라 중학교를 졸업한 후 학부모님이 감사의 의미로 학원에 떡과 피자를 주문해서 보내주셔서 3학년 아이들 졸업식이 열렸던 날은 우리 학원에서도 우리만의 잔치가 벌어졌다.


이전 11화 선생님 저 피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