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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Aug 02. 2020

키치와 허무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테라

너무도 유명한 소설이라 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제목부터 약간 꼬여 있어 ‘이게 무슨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무언가 있어 보이는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심지어 작가 이름조차 그렇다. 마치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나왔던 ‘이기적 유전자'처럼 책 좀 읽어봤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야만 할 것 같다.


결혼해서 아들을 하나 낳고, 이년만에 이혼한 외과의사 토마시와 시골 웨이트리스 출신인 테레자의 사랑을 중심으로, 토마시가 테레자와 만나기 전부터 사귀던 사비나와 사비나의 또 다른 남자로 유부남인 프란츠에 대한 얘기다.


토마시와 사비나는 자유로운 연애 생활로 ‘가벼움’을 상징하고, 테레자와 프란츠는 진지함과 순수함으로 ‘무거움'을 대변한다. 토마시는 같은 여자를 세 번 이상 만나지 않는 바람둥이 생활을 즐기다가 테레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바람둥이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다. 유부남인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빠져 자신의 부인을 버리지만 사비나는 그런 프란츠가 부담스러워 배신하고 떠나자 자신을 따르던 어린 제자와 산다.


쿤테라는 이렇게 질문한다.
무거움은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무엇이 긍정적인가?
무거움인가, 가벼움인가?

소설은 니체로 시작해서 니체로 끝난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똑같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거고, 현재 선택한 것이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거다. 역설이다.


작가는 영원한 것은 무겁고, 한번뿐인 것은 가볍다고 말한다. 역사가 가볍다고 한 이유는 보헤미아의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거다. 하지만 역사도 반복된다. 시대와 공간을 달리 할 뿐이다.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제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인생이라는 드라마는 무거움의 은유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짐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지고, 짐이 없어지면 비 현실적이 되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진다.”


인생은 무겁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서로 배신하면서 공허함을 느끼고, 그래서 가볍다. 그런 존재의 가벼움을 작가는 참을 수 없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진정 사랑했지만 그들은 서로 지옥만큼 괴로웠는데 그 이유는 감정 때문이 아니라 권력관계였기 때문이다. 벨 훅스의 ‘All about Love’에 보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많은 관계가 사실은 권력관계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사실이다. 오류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행동 방식 혹은 감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존 불가능성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왜냐하면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기 때문이다.”


토마시가 계속 다른 여자와 자는 이유는, 여자라는 한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를 여자 사냥에 내모는 것은 관능의 욕구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이었다. 수많은 여자를 추구하는 남자는 두 범주로 쉽게 나눌 수 있다. 한쪽은 모든 여자에게서 자기 고유의 꿈, 여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찾는다. 다른 쪽은 객관적인 여성 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사비나가 여러 남자와 자는 이유는 배신에 대한 욕망 때문인 거 같다. 아니 배신 뒤에 오는 공허함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반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부모도 남편도 사랑도 조국도 없을 때 배반할 만한 그 무엇이 남아 있을까?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프란츠가 와이프에게 불륜을 고백한 이유는 ‘공과 사’가 일치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고, 이런 원칙은 ‘대장정’ 같은 ‘키치’로 연결되어 결국 방콕에서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프란츠는 모든 거짓의 원천이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분리에 있다고 확신했다. 개인적인  속에서의 모습과 공적인  속에서의 모습은 별개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작가는 공산주의를 하나의 ‘키치'로 규정하며 대놓고 비판하고 있다. 키치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미학 관련 독일어 단어로 ‘나쁜 예술’이란 뜻이고, B급임을 당당히 표방하는 예술이 아니라, 겉으로는 A급처럼 포장하는 예술이다. 키치는 이처럼 인류를 위한 감동으로 포장한다.


“키치는 백발백중 감동의 눈물 두 방울을 흐르게 한다. 첫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 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번째 눈물은 이렇게 말한다.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키치가 키치다워지는 것은 오로지 이 두 번째 눈물에 의해서다.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스탈린 아들이 똥 때문에 죽게 된 사연으로 시작해서, 키치를 ‘똥에 대한 부정'이라거나  ‘신에겐 창자가 없다'는 비유는 인상적이다. 쿤테라는 무신론자였던 거 같고, 키치에 대한 혐오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작가는 사비나를 통해서 자기 예술이 '두 세계의 만남이라는 테마'를 지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고, 현재 보헤미아의 예술이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당신을 보고 있자니 당신이 내 그림의 영원한 테마 속에 녹아드는 중이란 느낌이 들어. 두 세계의 만남이라는 테마. 이중노출이랄까? 바람둥이 토마시의 그림자 뒤에 낭만적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이 나타나거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어. 오직 테레자만을 생각하는 트리스탄의 모습에서 바람둥이의 아름다운 세계가 언뜻 엿보이기도 하고.”


“앞은 완벽한 사실주의 세계였고, 그 뒤에는 무대장치의 찢어진 캔버스 뒤편처럼 뭔가 다른 것, 신비롭고 추상적인 것이 보였지.” 그녀는 말을 멈추더니 다시  덧붙였다.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리였지.”


현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세계가 맞닿아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맞닿아 있고, 거짓과 진리가 함께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둘 사이를 왔다 갔다 방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흥미롭다. 한쪽으로 정해지지 않고, 정해질 수도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쿤테라는 4명 중 누구의 삶을 더 긍정적으로 봤을까? 일반적으로 혼자 살아남아 자유롭게 살고 있는 사비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면 사비나처럼 사는 게 어떨까 꿈꿀지 모르겠지만, 나는 쿤테라가 무거움 쪽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무거움은 프란츠처럼 ‘키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고 테레자가 긍정적인 삶이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테레자는 토마시 때문에 지옥 같은 느낌이었고 오히려 키우던 개 ‘카레닌'에게 더 많은 사랑과 위로를 받았다.


쿤테라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미지의 무엇이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미지의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쿤테라는 이런 허무주의를 동물과의 관계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건가? 인간보다 동물과의 관계에서 더 희망을 느끼는 거 같다. 마지막에 니체가 미쳐 버린 게 마부와의 일 이후라고 말하는 걸로 봐서 더 그렇다. 니체는 이런 허무주의를 극복한 사람을 초인이라 불렀는데, 과연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해서 미쳐 버린 걸까?


내가 생각하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찾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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