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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Sep 25. 2018

우리들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이라는 소설은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생각해보니 러시아 소설은 톨스토이의 몇몇 소설을 빼고는 읽은 기억이 없다.


작가는 페테르부르크 대학 조선학과 재학 중 볼세비키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유배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 고리끼 등과 문학활동을 같이 했다. 1920년대 말 [우리들]이 발표되었고 공산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1932년에 파리로 망명하게 된다. [우리들]은 1932년에 발표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1949년에 발표된 조지 오웰의 [1984]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이야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혁명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1920년대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작가의 용기가 놀랍다.


소설의 배경은 2백 년 전쟁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단일 제국>을 세우고 이 제국의 사람들은 완벽한 통제 속에 살아간다. 시간 율법 표가 제공해주는 의무적인 산책, 정확한 식사시간, 똑같은 기상과 취침시간 등이다. 국가가 성생활도 통제하는데 성호르몬을 분석하여 섹스 일정표를 짜준다. 그리고 일정표에 따라 원하는 상대를 지목하고 신고하면 허가증을 발부해 준다.


이 제국의 사람들은 이름 없이 번호로 불리며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화자인 D-503은 I-330을 만나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혁명에 동참하지만 혁명은 실패하고 결국은 수술을 받고 감정이 완전히 지워지게 된다.


“고대의 현자 중 누군가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현명한 얘기를 했다. 〈사랑과 기아가 세계를 지배한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성욕과 식욕이다. 이게 기본이다. 그다음 욕구들은 부차적인 문제다. 이것을 적절히 컨트롤할 수 없는 사회는 멸망하기 쉽다. 너무 과해서도 부족해도 안 좋다.


“나는 안개를 증오해요. 나는 안개를 두려워해요. 그것은 즉 사랑한다는 얘기죠. 그대는 안개가 자신보다 강력하기에 두려워해요. 그리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증오하지요. 또 정복할 수 없기에 사랑하지요. 사실상 우리는 정복할 수 없는 것만을 사랑할 수 있죠.”


인간은 자기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있다. 공포는 두려움과 함께 증오를 불러오기도 하지만 또한 그 때문에 사랑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끝었는 동경이 끝없는 해석과 설명을 낳고 그것이 인간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수학과 죽음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우리의 세계인 표면계에서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 완전히 다른 거대한 세계가 있다는 얘기다. 표면의 저쪽에….”


수학은 인간이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인간은 수학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이해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고 그 표면의 저쪽에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어쩌면 완전히 다른 거대한 세계가 있을 수 있다. 인간이 그걸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수학 때문일 거다.


“세계에는 두 가지 힘이 있어요. 엔트로피와 에너지죠. 전자는 축복받은 평온, 행복한 균형을 지향하며 후자는 평형의 파괴와 고통스러울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동을 지향하죠”


이 세상에 절대적인 ‘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무’라는 것은 에너지가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 일수 도 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에너지의 균형이 깨지면서 엔트로피가 증가한 것이다. 엔트로피도 무한이 증가할 수는 없고 엔트로피가 증가하다 보면 다시 에너지 균형이 맞추어지면서 무가 될 것이다.


“숫자란 무한한 거예요. 도대체 어떤 마지막 수를 원하는 겁니까? 당신은 그럼 도대체 어떤 마지막 혁명을 원하는 거죠? 마지막이란 없어요. 혁명이란 무한한 거예요”


숫자가 무한한 것처럼 마지막 혁명은 없다는 것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가장 핵심적인 말이라 할 수 있다.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욕구를 완벽히 통제할 수도 없고 개개인의 자의식을 획일화할 수도 없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건 다양성을 인정할 때이다. 사람은 무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는데 무한은 시작도 끝도 없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듯이 우주도 태어나고 죽을 것이고 이 세상 모든 건 시작과 끝이 있는데 숫자는 무한하다. 숫자는 인간이 생각해 낸 것일 텐데 우주를 설명할 수 있고 무한하다.


“그러면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사실 욕망이란 고통스러운 거죠. 안 그래요?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의 욕망도 없는 상태가 행복이란 거죠. 우리가 여태껏 행복이란 단어 앞에 플러스 표시를 해온 것은 엄청난 실수이며 엄청나게 어리석은 편견이죠. 절대적 행복 앞에는 물론 마이너스 표시를 해야 해요. 거룩한 마이너스 말이에요.”


불교에서도 말한다. 욕심을 버려야 행복하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하지만 욕심을 버리고 행복을 얻는다는 자체가 좀 불만스럽다. ‘버리기’보다는 ‘균형’이 행복과 어울린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과욕이 불행하게 하는 것처럼 욕심을 버리는 것도 불행한 게 아닌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속에서 전체 속에서 힘을 키워오며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향에서 점점 개인이 중요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인류발전의 필수 조건은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성일 것이다.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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