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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Oct 07. 2018

읽다. read. 讀

김영하

<보다​>, <말하다​>에 이은 산문 삼부작의 완결판이라고 한다.


김영하 작가는 알쓸신잡에서 매력을 느껴 몇몇 책을 찾아 읽어보았다. 데뷔작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부터  ‘검은 꽃’,’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등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실망했다. 기대가 너무 컸나 보다.


‘읽다’는 요새 나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에 재밌었다. 그동안 그냥 읽는 것에 비해 남는 것이 없어서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독서모임에 나가고, 책에 대해 말하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위해, 읽은 책을 다시 곱씹는 과정에서 내 생각이 정리되고 확장되고 있음을 느낀다.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김영하는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책을 읽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아를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미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과도한 감정이입이 되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책의 본질이 헤매게 하는 정신적 미로와도 같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고, 책을 읽어도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왜?


자아가 분열되어야 평소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감정이입이 되어야 정신적 변화가 일어난다. 정신의 미로 속에서 헤매어 봐야 무엇이 중요한지 뚜렷해진다. 도덕적 금기에 직면하고 욕망의 저 밑바닥까지 보아야 내가 어떤 인간인지 대면하게 된다.


책 속에 길이 없고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읽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인간이 바로 이야기 그 자체이고, 끝이 없는 이야기는 또 하나의 우주와 같다.


# 위험한 책 읽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아를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p31


보르헤스에 따르면 “고전은 클라시스, 즉 전함이나 함대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고전은 질서 정연한 책입니다. 배를 탈 때는 모두 그래야 합니다.” -p10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p11


# 우리를 미치게 하는 책들

책을 읽다 보면 감정이입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게 자연스러운 거다.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면 평소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인간 자체가 이야기이고, 이야기의 세계는 또 다른 우주를 이룬다.


쥘 드 고티에가 명명한 또 하나의 ‘보바리즘',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기능' -p63


다니엘 페나크의 보바리즘이란 “‘오로지 감각만의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충족감'에 다름 아니다. 즉 상상이 극에 달해 온 신경이 떨려오고 심장이 달아오르며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는 가운데 주인공의 세계에 완전 동화되어, 어처구니없게도 대뇌마저 (잠시나마) 일상과 소설의 세계를 혼동하기에 이르는" 현상, 즉 소설을 읽는 독자가 겪는 정신적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p66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p69


# 책 속에는 길이 없다.

책 속에 어떤 길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읽다 보면 이내 실망하고 만다. 길이 보이는 게 아니라 더 헷갈리게 하는 게 책의 본질 일 수도 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닙니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p101-102


분명히 우리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뭔가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뭔가를 남에게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미로와 타인이 경험한 미로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p103


#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다.

인간은 가상의 세계를 믿을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이 인간을 지금처럼 발전하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한다. 소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덕적 금기에 도전한다. 그래서 유익하지는 않지만 사람이 변할 수 있다.


오르한 파묵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p113


바로 이 순간 독자는 밀란 쿤테라가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이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일단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겠다'라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p123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p141


# 매력적인 괴물들의 세계

소설에서는 유난히 극단적인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 그래야 잘 팔리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감춰진 욕망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론가 신형철

제대로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을 집어던질 수 있게 될 것이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될 것에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p154


책속에는 길이 없다.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게 책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을 변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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