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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Mar 23. 2019

보다, see, 見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보다>, <말하다​>, <읽다> 산문 삼부작 중 첫 번째이다. 개인적으론 <읽다>가 가장 좋았고 다음이 <보다>, <말하다> 순이다. 김영하는 내가 보기에 소설보다 에세이가 좋다고 느꼈는데 <검은 꽃>에 실망해서 그렇다. 그래서 첫인상이 중요하다.


인사이트가 내적인 통찰력이라면 아웃사이트는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외적 통찰력이라고 한다. <보다>에는 영화, TV, 책과 사회현상을 보는 김영하의 통찰력이 곳곳에 묻어있다. 일단 알고 있는 게 많고 그걸 적재적소에 풀어놓는다. 부러울 따름이다.




<건축학 개론>은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에 관한 영화가 아니고 욕망에 관한 영화라고 한다. 집을 짓고 싶다는 아버지의 욕망을 빌려 자신의 첫사랑에게 접근한 거다. 자신의 진짜 욕망이 타인의 욕망으로 은폐되어 있다. 은폐되어 있는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프랑스 철학자 라캉은 히스테리란 “자신의 욕망을 만족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고 한다.

 

권태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남의 욕망에 따라 연기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들로서 부모의 욕망에 따라, 남편으로서 아내의 욕망에 따라, 아빠로서 자식의 욕망에 따라, 그런데 이런 연극적 자아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연극 보는 걸 지루해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연극 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고 한다.


<그래비티>에서 우주는 절대 고독을 상징한다. 우울증 환자들은 혼자 죽는 고통을 미리 맛보는 것이고 삶이 이미 죽음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절대 고독을 죽음으로 끝내려 한다. 이런 고독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고대 로마 연회에서는 노예들이 해골바가지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이것은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깊은 뜻이 있기보다는 흥을 더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 보는 건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드는데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이다. '알랭 드 보통'은 <철학의 위안>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죽음이라는 것을 진정 이해한다면 무서울 게 없고 현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죽음과 삶은 연결되어 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나 소설 <오디세우스>를 보면 이야기 속에 이야기로 액자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런 구성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설득력을 확보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은 진심을 담아 전달하기만 하면 상대가 믿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야기, 스토리 텔링이 필요한 거다.


<링크>의 저자 ‘바라바시’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측 가능한데 일상생활의 93% 정도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측되지 않는 7%가 인간다운 게 아닌가? 정해진 운명은 없다고 항상 생각해 왔는데 93% 정도는 정해진 것일 수 있다. 김영하가 점을 봤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다" 돌을 피할 수는 있지만 쉽지 않다고 한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에 따라 연기하며 살아가고, 고독한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며, 진심이 전해지지 않아 답답해한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이 흥미롭지 않냐고 김영하는 말한다.




p10

부자에게든 빈자에게든 주어진 시간은 똑같다(다만 그 가격이 다르다. 부자의 시간은 비싸고 빈자의 시간은 싸다.)


p18

자본주의 사회의 마케팅이란 것은 고객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것도 필요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면 고객에게 이미 있을 것이다.


p68

이십 대는 몸으로, 사십 대는 머리로 산다. 살아보니 둘 다 나름대로 좋았다.


p90

남의 위험은 더 커 보인다. 반면 자기가 처한 위험은 무시한다. 그게 인간이다.


p94

에피쿠로스가 죽음의 무의미성이라는 계단을 통해 고귀한 쾌락의 세계로 들어갔다면, 우울증 환자들은 삶의 무의미와 고통이라는 다이빙대에서 죽음의 세계로 점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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