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청년 Dec 16. 2019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카를로 로벨리의 존재론적 물리학 여행

우리가 멀리서 바다를 보면 그냥 평평한 파란 천이 펼쳐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파도가 넘실거리고 부딪쳐서 하얀 거품이 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멀리서 보는 바다라는 파란 천은 가상이고, 가까이서 보면 물분자들의 요동만 있을 뿐인데 이게 실재다.


카를로 로벨리는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부터 최신의 양자중력이론까지 넘나들며 우리의 인식체계를 확장시킨다. 결론부터 말하면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다.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을 보면서 처음으로 우주론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고, 양자역학을 접했다. 이때 들었던 두 가지 의문이 우주가 빅뱅에서 시작했으면 빅뱅 이전은 무엇?이었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우주 끝, 그 너머는 무엇이 있는가? 였다. 그래서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도 보고, 김상욱 교수의 [떨림과 울림], [양자 공부], 짐 배것의 [기원의 탐구, ORIGINS] 같은 책들을 봤지만 결론은 다 정확히는 모른다였다. 하지만 로벨리는 이런 두 가지 의문에 대해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다. 정확히 말하면 기존 이론의 문제점들을 다른 식으로 해결한다.


로벨리는 우주 탄생이 빅뱅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빅바운스였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빅뱅 이론은 부피가 없는 한 점에서 우주가 폭발했다는 건데 수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다. 빅바운스는 우주가 중력에 의해서 수축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양자효과에 의해 서로 밀어내면서 팽창한다. 우주는 이렇게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는 게 빅바운스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빅뱅은 없었고 당연히 그 이전도 없다.


우주 끝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주는 유한하면서도 끝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한다. 지구 표면을 한쪽 방향으로 쭉 걸어가면 끝없이 걷게 되는데 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3차원 공간도 구부러져 있으면 유한하지만 끝이 없을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나, 화가 에셔의 계단을 생각해보면 된다. 이 책에선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내용으로 설명했다. 이런 3차원 공간을 ‘3-구’라고 한다.


즉 단테의 말로 하면 우리의 우주인 구형을 “둘러싸면서" 또 그것으로 “둘러싸인" 또 다른 거대한 구형을 본 것입니다! 여기 <천국> 편의 제27가에 등장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주의 이 다른 부분이 그것을 구형으로 둘러싸니 그것이 다른 것들을 둘러싸듯 하더라" 그리고 30가에서는 마지막 “원"에 대해 “그것이 둘러싸는 것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빛의 점과 천사들의 구가 우리 우주를 둘러싸면서 동시에 우리 우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죠! 정확히 3-구의 묘사입니다. -p99



또 한 가지 큰 의문은 프랭크 클로우스의 [빅뱅 직전의 우주, void]를 읽으면서 공간이란 무엇인가? 였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3차원의 박스 같은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물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물질을 빼고 남은 그 박스가 공간인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란 게 가능한가? 공간은 물질과 물질의 상대적인 관계로 정의할 수밖에 없는데 물질을 뺀 공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도 로벨리는 답해준다.


양자역학 책을 보면 ‘장(전기장, 자기장 할 때 장)'이라는 것이 중요한 개념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그게 거의 전부다. 원자와 전자를 설명할 때 원자는 태양이고 전자는 지구처럼 원자를 중심으로 궤도를 돌고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전자는 원자를 둘러싸고 있는 확률 구름이다. 한마디로 전자는 ‘장’으로써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공간도 '장'이다. 물질을 담는 어떤 박스가 공간이 아니다. 물질이 양자 중력장의 형태로 서로 이웃하고 있는 그 자체가 공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간은 없고 양자 중력장만 있다. 시간도 양자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써 생겨나는 것뿐이다. 결국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양자 중력장만 있다.


아인슈타인은 처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합쳐 시공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하지만 양자중력이론은 시공이라는 것이 가상이고 양자 중력장이 실재라고 말한다. 그래서 작가는 '보이는 세상이 실재가 아니다'라고 말한 거 같다.


이 책을 읽고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과학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한 설명과 깨달음을 준다. 하지만 과학은 지금까지 최선의 답이지 진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증명되지 않으면 이론일 뿐이다.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든지 새 이론으로 대치될 수 있다. 이것이 과학이 신뢰할 만한 이유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확신하지 않는다





p76

아인슈타인은 에너지와 질량이 동일한 존재자의 두 면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자기장과 전기장이 동일한 전자기장의 두 면이고,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시공의 두 면인 것처럼 말이죠. 이는 질량이 그 자체로 보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너지도 독립적으로 보존되지 않고요.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하나의 단일한 보존법칙만이 존재하는 것이죠. 둘이 아니고요. 보존되는 것은 질량과 에너지의 총합이지, 각각 따로따로가 아닙니다. 달리 말해 에너지를 질량으로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115

“내가 보기에…”라는 멋진 시작은, 페러데이의 망설임이나 뉴턴의 망설임, 또는 <종의 기원>의 처음 몇 쪽에서 엿보이는 다윈의 불확실함을 생각나게 합니다. 천재는 그가 내딛고 있는 발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기에 언제나 망설이거든요.


p133

양자역학은, 세계는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볼수록 더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요동이며, 미소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미시적으로 우글거리고 있는 곳입니다. 세계는 작은 자갈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떨림으로, 우글거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p176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의 부근에 있는 것이며 공간은 사물들이 근접하는 관계의 조직입니다. 우리가 공간을 불변하는 용기로 생각하는 것을 버린다면, 시간을 실재가 펼쳐지는 불변하는 흐름으로 생각하는 것도 버려야 합니다. 사물들을 담고 있는 연속적 공간이라는 생각이 사라지듯이, 현상들이 발생하는 흐르고 있는 연속적인 ‘시간'이라는 생각도 사라지는 것이죠.

어떤 의미에서 공간은 기본 이론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력장의 양자는 공간 속에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본 이론에서는 시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력의 양자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 양자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써 생겨나는 것이 시간입니다. 휠러-드위트 방정식이 보여주듯, 기본 방정식에는 더 이상 시간 변수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시간은 공간과 같이 양자 중력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p207

과학이 성립하는 것은, 가설과 추론, 직관과 시각, 방정식과 계산 후에, 우리가 제대로 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론은 우리가 아직 관찰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예측을 제공하고, 우리는 그 이론의 예측이 옳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과학의 위대한 힘이며, 과학을 신뢰하고 마음 편히 믿을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p251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에 관해 대리석이 제공하는 정보와 관련된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원반 던지는 사람, 페이디아스, 아리스토텔레스, 대리석에 관한 아주 복잡한 어떤 것이며, 조각상의 원자들의 상호 관련된 배열 속에 그리고 이 원자들과 우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머리에 있는 수많은 다른 원자들 사이의 상관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당신 손에 든 하얀 바둑돌이 내 손에 있는 바둑돌도 하얗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원반 던지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해줍니다. 우리는 정확히 이것을, 즉 정보를 가장 잘(유지되기 가장 좋게) 관리하기 위해 선택된 구조입니다.


p258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해서 그가 들었던 대답 하나를 다소 농담조로 보고합니다. “깊은 신비를 조사하려는 너 같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 이 장의 첫머리에 인용된 데모크리토스의 말에도 똑같이 ‘깊은'이 나오지만, 이 ‘깊은'은 우리에게 가서 진리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저로서는, 우리의 무지를 직시하고 받아들여 그 너머를 보려고 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쪽이 더 좋습니다.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미신과 편견에 빠지지 않는 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진실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가장 정직한 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삼삼한 독서단 2기를 마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