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소한 그림들에 예술적 가치가 없다 해도, 나는 마음의 상처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헤르만 헤세)
이 얼마나 다정하고 용기 있는 말인가. 몇 년 전 서울에서 열린 '헤세와 그림들' 전시회장에서 보았던 이 글귀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위로했다. 소설 '데미안'을 탄생시킨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는 마흔에 붓을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정신과 의사의 조언에 따라 치료의 목적으로 시작하게 됐는데, 글만큼이나 그림에도 빠진 헤세는 훗날 '작가 헤세'에서 '화가 헤세'로도 인정을 받게 된다.
헤세는 벨기에를 침략한 독일 정부를 비판하다가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박해를 받다가 스위스로 이주했다. 평생 글을 쓰며 훗날 노벨문학상의 영예도 안게 되지만, 젊은 시절 겪은 전쟁과 험난한 가족사를 통해 얻은 고통은 그림을 통해 치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 헤세가 아닌 화가 헤세로, 그의 그림만을 모은 전시회가 후대에 열리게 될 것을 당시 헤세는 상상이나 했을까. 그의 대표작 '데미안'에 실린 글귀를 보니, 그는 어쩌면 이런 운명도 미리 짐작했는지 모르겠다.
"운명과 기질은 같은 개념의 다른 이름이다."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반대로 글에 빠진 화가들은 없을까. 야수파로 알려진 프랑스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는 10대 대부터 그림을 그린 전문 화가이지만 소설, 회고록 등을 집필하며 문장가로도 알려졌다. 그가 생전에 남긴 유언장 속 짧은 문장에는 전쟁의 시대를 살다 간 그의 삶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수천 번의 사고에서 탈출하여 아직도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문명화된 인류의 과학적 난폭성에 저항하며 지상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놀랍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
헤세, 블라맹크 등과 같은 전쟁의 시대를 살다 간 예술가들에게서는 공통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데, 모두 평화에 대한 치열한 갈망이 그들의 작품에 녹아있다는 점이다. 국내에도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한 원로 작가의 간담회에서 들었던 "이 시대를 살다 간 한국 작가들은 반드시 분단 문학을 해야 한다."는 일침이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주던 때가 생각난다.
그저 글이 좋아서, 그림이 재미있어서 펜과 붓을 들었을 뿐인데, 전쟁을 겪은 원로 작가들에게 글과 그림은 그저 재미가 아니었으리라. 우리는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분단'을 겪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헤세는 "작가는 독자가 아니라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기억하면서, 나는 오늘도 쓰고 그린다. 비록 예술적 가치가 없다 해도, 마음의 상처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