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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Oct 28. 2020

도제식 기자 교육

‘이른바 한글 첫 세대로서 전쟁, 분단, 실향, 가난의 온갖 역사적 시련을 겪으며...(후략)' 지난해까지 나의 스승이자 선배, 때로는 '글 친구'가 되어주셨던 주필님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碑文)이다. 나는 이 비문을 직접 데스킹 했다.


주필님께서 돌아가신 후 열흘쯤 지나서였을까... 사모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주필님이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 누워 자신의 비문에 새겨달라며 작은 목소리로 읊으신 말을 종이에 받아 적은 것이라며, 손 글씨로 적은 종이 한 장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오셨다.


"그이가 (편집)부장님이 송고한 글을 컴퓨터 앞에 앉아 데스킹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제 부장님께서 그이가 남긴 마지막 글을 데스킹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로지 주필님을 통해 글을 배웠다. 국문학을 전공하거나 언론고시를 통해 기자가 된 사람들과 달리, 원로 언론인 한 분께 일대일로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 주필님은 40년대 초반 일제 강점기 시절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으셨고, 60년대 중반 사회부 기자부터 시작해 해외특파원, 정치부장, 논설위원·실장 등 40년이 넘는 세월을 언론인으로 사셨다. 몇 차례 기자협회상도 수상하신 정통 언론인으로 신문사 퇴직 후에는 작은 월간지를 발행하는 곳에 계셨는데, 그곳이 내가 주필님을 만나게 된 곳이다.


언론의 언자도 모를 젊은이가 고작 책 두어 권 내본 경험으로 자신의 밑에 들어왔으니, 얼마나 까마득하게 어리고 좋게 말해 '귀엽게' 보였을까.


"자네 글엔 감정이 너무 많아. 감정을 빼란 말이야!"


수필을 쓰던 친구가 기사를 쓰고 있으니, 나는 (감정을)뺀다고 뺀 건데도 주필님 눈에는 형편없을 글이었다. 매일 이렇게 혼나가며 글을 배웠다. 그런데, 그런 내가 주필님의 비문을 고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사모님의 연락을 받고 한참을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다. 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고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나의 글을 모니터에 띄워두고는 구부정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계셨을 주필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미간을 찌푸리며 '타닥타닥' 느린 타자로 글을 고치시면서도 "이번 주제가 아주 좋구먼. 발상이 좋았어."라는 칭찬의 글 한 줄을 서두에 적어주시던 분이셨다.


또 한편, 사모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사모님이 가장 많이 보았을 주필님의 모습은, 방 안 컴퓨터 앞에 돌아앉아있던 구부정한 등이지 않았을까. 병상에 누우신 상태로 입을 통해 천천히 읊어진 비문(碑文)이기에, 혹여 잘못 받아 적어 비문(非文)이 된 거면 어쩌나 고민 고민하진 않으셨을까...


도제식 교육은 어느 특정 분야에 정통한 사람의 기술을 그대로 전수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그 사람만의 색깔이나 습관까지도 답습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글에는 글쓴이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묻는다. 그런 점에서 나의 글에는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지만)주필님의 발끝 정도에는 닿을 수 있는 비슷함이 있을 것이다.


사모님께서 완벽한(문법적으로 오류가 없는) 문장을 원하셨다면 얼마든지 다른 전문가들을 찾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주필님 지인 중에 얼마나 많은 언론계 인사들이 있겠는가. 하여, 굳이 나를 찾았던 배경에는 다른 의미의 고심이 있었으리라 생각돼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필님의 음성도 들리는 듯했다.


'내가 자네 글을 매일 고쳐줬는데, 자네는 이거 한 번을 못해주는가.'


주필님이 떠나신 지 일 년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월간지 편집 작업을 하고 있고, 나의 데스킹이 그대로 최종이 되어 부족한 글이 그저 토해지듯 발행되고 있다. 여전히 나는 나의 글에 자신이 없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보내온 기사 초안을 읽어가며 (늘 들어왔던)한숨 섞인 혼잣말을 내뱉는다.


'왜 이렇게 글에 감정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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